이명박과 경주이씨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6/05/27 [00:47]

이명박과 경주이씨

새만금일보 | 입력 : 2016/05/27 [00:47]


이명박(李明博)은 1941년 12월 19일에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다. 이충우는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가 고향인 목부(牧夫)로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른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상(相)자 돌림이지만 혼자만‘명박’인 이유는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는‘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었기 때문이다.
족보에는 돌림자를 딴‘상정’(相定)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제17대 대선 때 돌림자가 다른 이름 때문에‘형제들과 배가 다르다’는 공격을 받아 DNA 검사까지 받기도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 덕성리 덕실마을에 정착했고 약 2년 정도 거주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다.
호적에 아버지 이름과 자신의 이름이 원래 이덕쇠(李德釗), 이상정(李相定)으로 돼 있었으나 이충우(李忠雨), 이명박(李明博)으로 바뀐 기록도 보인다. 아버지는 귀국 후에도 목장 일에 종사했고 어머니 역시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그의 가족의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았다.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한국 전쟁이 터졌고 미군의 폭격으로 바로 위의 누나와 귀국 후 태어난 막내 남동생을 잃었다. 포항중학교 시절에는 전교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 소리를 들었지만 워낙 집안 형편도 어려웠고 3남으로서 도저히 고등학교를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학교 담임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장학금만으로 다니겠다는 전제 하에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에 들어가 일당노동자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대입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그 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고향마을인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 속칭 덕실마을은 경주이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는 경주이씨가 26가구에 67명이 살고 있다. 4촌 형수와 6촌 동생, 8촌 형 등 친척이 다수 살고 있는 곳이다. 이명박은 광복과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와 살다가 1950년 6·25 전쟁 중에 포항 시내로 이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한 덕성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곳을 고향으로 여긴다.
한편 우리나라 이씨의 양대 산맥은 △경주이씨와 △전주이씨다. 전주이씨는 조선조 왕성이 되면서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씨본관별로 3번째 인구가 많다. 그러나 전주이씨와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 개 본의 이씨를 제외하면 거의 경주이씨에서 갈라졌다. 이씨 본관 가운데 △합천 △가평 △평창 △원주 △아산 △재령 △우봉 등은 모두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의 후손에서 갈라진 것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은 신라의 육촌장 중 한 사람이다. 이알평은 다른 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공으로 유리왕이 여섯 촌장들에게 성을 하사할 때 이알평에게는 이씨의 성을 하사한다. 1세조는 신라 때 벼슬을 지낸 이거명이다. 시조 이래 대대로 경주에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경주이씨에서 가장 융성한 집안은 △상서공파“백사 이항복의 집”과 △익재공파의 “8별집”그리고 이완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다. 조선조에 “백사집”에서만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온다. 8별집에서는 좌의정과 대제학이 각각 1명, 국당공파는 좌의정 1명을 내 조선조 경주이씨의 융성은 사실상 이 3파가 중심이다.
경주이씨는 고려 말 익재 이제현(1287~1367)을 배출하면서 삼한의 명족으로 위치를 굳힌다. 그는 대학자이자 외교가였으며 문장가였다. 익재는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긴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은 상서공파의 후예다.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국난을 수습했다. 그는 조선조“4대 명재상”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이항복은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영조 때에 좌의정 이태좌, 소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광좌,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일 등이 모두 백사의 후손이다.
국당공파에서는 병자호란 뒤 효종,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 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조선조 경주이씨 가문에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 이벽 이다. 정조 3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앵자봉의 천진암에서 정약용 3형제 등 10여명을 상대로 천주교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천주교의 시작이다.
근세의 인물인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상설도 경주이씨 후손이다.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은 백사의 11세손으로 한말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이인,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갑성,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도 경주이씨가 낳은 인물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142만4,86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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