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해버려!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6/22 [07:11]

극복해버려!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6/22 [07:11]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봄나들이 갔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면서 크게 다쳤다. 계단이 몇 개 남은 걸 분명 알고 있었는데 어쩌다 넘어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창피했다. 평소에 내가 워낙 계단을 조심했었기에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게 불가사의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억울했다. 왜 하필 내가 넘어졌을까. 두꺼운 청바지를 입었는데도 무릎이 심하게 찢어진 것도 억울했고 나들이 막바지에 그랬다는 것도 억울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들이 첫머리에 그랬다면 같이 간 동료들에게 얼마나 민폐였을까. 다행히 마지막 코스에서 일어난 사고였기에 서둘러 일행들과 귀가할 수 있어 덜 미안했다. 무릎이 찢어졌지만 뼈는 이상이 없어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넘어지는 걸 지켜본 동료들은 이만하길 기적이라고까지 말한다. 골절 없고 얼굴 말짱하고 머리 안 다쳤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다. 아니 하늘이 도왔다고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위로가 될 순 없었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꿰맨 무릎을 구부릴 수 없어 양말도 못 신고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속을 끓였다. 의사는 입원을 권했지만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니 그것도 도전이었다. 아마 평생 입원한 적이 없는 두려움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봄도 다 놓쳐버렸다. 이팝나무 꽃이 눈처럼 소복하더니 그새 꽃을 다 버리고 초록 잎이 무성했다. 온몸에 타박상은 마음에 상처까지 주며 푸르스름해졌다. 억울한 마음이 상처를 더 도지게 하는 듯 아프고 쓰라렸다. 나갈 수 없어 사람을 만나질 못하니 우울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고 즈음 내 마음이 너무 황폐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항상 불에 데인 것처럼 파닥거리며 조급했고 모든 게 불만스러웠다. 무언가에 만족할 줄 모르고 안 되는 것에 대해서만 야속하고 섭섭해 했다. 그리고 버거웠다. 뭔가 내려놓고 싶었지만 나만 낙오 되는 것 같아 아깝고 안타까웠다. 갑자기 나보다 낮은 쪽보다 내 위만 바라보며 불평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산 시간들이 부끄러웠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고 나니까 소중한 것이 무엇이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차츰 얕아지며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라는 중국 속담이 생각났다. 그간 다리 때문에 한 번도 불편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걷는 것이 이토록 감사한 일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어느 작가는 말한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다고. 기쁨이 없다는 것은 결국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여태 누리고 있던 탈 없이 평범했던 것들이 행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모르고 혼자만 불행한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측은해 몸이 안타까워했나 보다. 그래서 감당할만한 사고로 나를 깨우쳐줬다고 생각하니 상처투성이인 몸뚱이가 너무 고마워 신음소리 내기도 미안했다.
 
 이제 지독한 상처들은 서서히 아물어 딱지가 생기고 가려움증이 심한 걸 보니 다 나아가는 것 같다. 양말도 못 신게 불편하던 무릎도 낮은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게 됐으니 거의 회복된 것 같다. 그러나 들쑤시는 뼈의 통증은 견뎌야하는 일이라기보다 극복해야할 일인 것 같다. 하긴 모든 지독한 것들은 견디기보다 극복해버려야 상황이 더 빨리 끝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정말 어떤 일이 힘들어서 어쩌지 못할 때 난 주문처럼 속삭인다.
극복해버려!
물론 극복하기 쉽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어렵고 힘들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나 상황 따위를 노력으로 없애거나 좋아지게 하는 게 극복의 정의라면 극복해버리는 것만큼 현재를 행복하게 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최화경<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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