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의 일화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05/03 [16:53]

영조대왕의 일화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05/03 [16:53]



영조는 조선조 제21대 왕으로 숙종과 천민 무수리 출신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평생을 근신하며 살았다. 출생 후 연잉군으로 책봉되었으며, 이복형 경종이 병약하여 아들이 없자 운 좋게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영조는 31세에 즉위한 이후 당론에 휘말려 온갖 고초를 겪었고, 심지어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기까지 하였다.

즉위 후 52년(1724-1776)을 재위하고 83세에 붕어하니 조선 역대 제왕 중 가장 장수한  오래 임금 자리에 있었다. 영조의 출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오는데, 그의 생모 최씨는 대궐에서 상궁들의 물을 떠다주는 하층의 궁녀였는데 숙종의 승은(承恩)을 입어 영조를 잉태하여 숙빈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중전이던 장희빈은 질투하여 최씨에게 몹시 매를 쳤다. 때 마침 숙종이 낮잠을 자다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큰 황룡 한 마리가 큰 항아리에 깔려 죽어 가는 꿈이었다. 숙종이 괴이하게 여겨 대궐 뒤뜰로 가보니 거기엔 과연 큰 항아리가 있어 내시를 시켜 치워보니 그 속에 숙빈 최씨가 기절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방으로 옮겨 치료하니 숙빈이 살아났는데 이 때 영조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묘하게도 사주가 4술 갑생(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이었는데 신하들이 모두 '4술갑'은 제왕이 될 사주라고 하였다. 이에 영조는 전국에 영을 내려 자기와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을 찾아오도록 명하였다. 이 때 강원도 산골짜기의 순박한 노인을 불려 왔는데 영조는 그 노인에게 "너와 나는 같은 4갑술 생인데 너는 어찌 임금이 못되고 한낱 농부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 노인이 답하기를 "전하? 소인은 제왕이 부럽지 않사옵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소인의 자식이 8형제이니 전하의 8도와 같사옵고, 또 벌통을 360통을 치우고 있으니 전하의 360주,읍(고을 수)과 같으며, 또한 그 벌통의 벌의 수가 700만 마리나 되니 이 나라 백성의 수와 같사와 사주가 맞는가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허허 크게 웃으며 회색이 만면하여 신하들에게 사주가 아주 헛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그 노인에게 많은 상급을 내리고 작은 벼슬까지 내렸다고 한다. 한편 영조는 무수리 최씨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주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며, 사대부들에게 금주와 사치를 금하도록 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방의 창호지가 떨어지면 손수 종이를 오려 붙이기도 하였다. 또한 비단옷 대신 무명옷을 즐겨 입었고, 신발과 버선이 닳아지면 기워 신도록 하였으며, 보료(요)도 낡은 것을 그냥 사용하였다. 옆에서 호조판서가 보다 못해 좋은 보료를 만들어 바치니 영조가 며칠 쓰다가 판서를 불러 "새 보료가 좋기는 하나 몸이 편하니 게으름이 생긴다."라며 도로 가져가고, 쓰던 것을 다시 가져 오게 하여 그 보료는 궁궐 창고에서 100년이 넘도록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탕평책과 민을 위한 서얼적서차별완화,기민정책,신문고부활,균역법 실시 등 그 치적이 세종대왕 못지않았다고 하며 실학의 태두인 손자 정조대왕 같은 성군을 만든 장본인이다. 오늘날 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헌법에 명시 된 민주주의는 퇴화 되어가고 물량주의와 계급주의가 부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대사기극을 벌인 왕을 능가하는 대통령은 세상의 진귀한 물품과 국고를 자기 맘대로 소유한 국정농단의 두 대통령과 대기업주의 정경유착과 뇌물죄로 감옥신세를 진 것과 평생을 그룹을 위해 헌신한 노동자를 개,돼지 취급한 5대양 6대주의 하늘을 나는 사주와 가족들의 갑질은 눈뜨고 볼 수가 없다. 금가락지 낀 손으로 얻어맞으라는 옛말을 잊고서 힘없는 노동자와 제 식구에게 폭력을 일삼아, 자기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지엄한 왕정정치보다 못한 추한 몰 꼴에 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예로부터 백성을 하늘처럼 보며 민심을 얻은 겸손한 왕은 천하를 얻게 되고, 민심이 떠난 왕은 내 쫒김을 당한 역사의 교훈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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