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금상동 이방간의 묘소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2/26 [16:58]

전주 금상동 이방간의 묘소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2/26 [16:58]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의 법수뫼 마을에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바로 위형님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소가 있다. 이곳 금상동의 법수뫼 마을의 당초 이름은 법사산(法史山)이다. 일명 법수뫼 마을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법수뫼를 법수(法守)산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법을 잘 지키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의 묘소가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법사장한(法史長恨)’이란 말이 생겼다. 법사장한(法史長恨)은‘한 맺힌 법사봉의 모습’을 말한다.
장한(長恨)의 긴 장(長), 원통할 한(恨)은‘오래도록 한이 되는 일’을 말한다. 회안대군은 왕자의 난으로 동생에게 패하고 한을 안고 살다가 풍경 좋은 이곳에 묻혔다. 회안대군 묘소에는 그의 부인 봉화금씨(奉化琴氏) 묘도 함께 있다.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1364∼1420)은 태조 이성계의 4남이다. 함흥 귀주동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망우당(忘牛堂)이다. 고려 때 소윤(少尹)을 지냈다. 이방간은 의령군 이맹중, 창녕군 이태, 금성군 이선, 금산군 이중군 등 4남을 두었다.
2000년 현재 회안대군파의 인구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이른다. 전주와 부안 등 주로 전북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당초 회안대군과 전주와는 아무 연고가 없었다. 회안대군이 전주에 살다가 이곳에 묻힌 후 그 자손들이 대대로 터를 내린 것은 왕자의 난 때문이다.
이성계는 전처이자 향처(鄕妻)인 한씨(韓氏) 소생에서 여섯 형제, 후처이자 경처(京妻)인 강씨(康氏) 소생에서 두 형제 등 모두 여덟 아들을 두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뒤 여덟 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러자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불만을 품고 이성계의 후처 소생인 두 아들을 모두 죽인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그 후 전처 소생이자 둘째 아들인 방과가 세자가 되어 제2대 임금인 정종이 된다. 정종은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임금 자리를 이어야 했다. 그래서 차례에 따라 회안대군이 왕위 계승자로 떠올랐다. 이 자리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바로 넷째인 방간과 다섯째인 방원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5남인 정안대군 이방원이 더 유력했다. 두 형제의 권력 다툼은 정종 2년인 1400년 드디어 무력 충돌로 나타난다. 이 싸움에서 형 방간이 동생 방원에게 패해 사로잡힌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다.
이에 앞서 당시 지중추원사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도전 제거 등에 공이 많았다. 그러나 제대로 예우하지 않는다며 불평하다가 죽주(현 충북 영동)로 귀양을 갔다. 여기서 박포는“정안대군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회안대군에게 거짓으로 충동질한다.
회안대군은 병사를 이끌고 개경에서 동생 이방원과 교전했으나, 동생에게 패하고 만다. 박포는 참수되었으나 이방간은 처형을 면한다. 회안대군 방간은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면되어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된다. 얼마 후 회안대군은 자신의 성씨 본관이자 조선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인 전주로 옮겨 살 것을 허락받고 이곳으로 옮긴다.
그 뒤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구만리 천내(川內)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당시 아버지 이성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복상(服喪)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다시는 한강을 건너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자손들에게도 전주에 살도록 유언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태종도 나이가 들어 아들인 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준다. 그러자 오래 전에 귀양을 보낸 형 회안대군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태종은 형의 귀양을 풀어주고 한양으로 올라오라고 한다. 만년에 특사를 보내어 회안대군에게 상경하라고 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를 거절한 회안대군은 태종이 재차 올라오라고 하자 병중의 몸으로 상경한다. 그러나 회안대군은 한양으로 가던 중 충청남도 은진 땅에서 생을 마쳤다. 이때가 1420년(세종 2) 회안대군의 나이 57세, 귀양길에 오른 지 20년의 세월이 지난 터였다.
회안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국장의 예우를 지내도록 하고 지관을 불러 길지를 택하도록 했다. 태종이 세 사람의 지관을 보내 묘소의 자리를 잡게 했다. 묏자리를 정한 지관들은 한양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태종이‘어떤 자리더냐’고 묻자 지관이‘대대로 군왕이 나올 자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종이 깜짝 놀라면서‘회안의 자손이 대대로 군왕이 된다면 내 자손은 어떻게 된다는 말이냐’라며 다시 전주로 내려가 지맥을 자르라고 했다.
지관들은 전주에 내려와 맥을 자르고 뜸을 떴다. 그 자리가 자그마치 수십 군데였다. 지관들이 다시 상경하여 태종에게 보고하기를‘이제는 회안대군의 자손들이 대대로 호미 자루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그때서야 안도했다.
지금도 회안대군의 무덤 뒤 산 정상에 올라보면 여기저기 심하게 골이 파인 흔적이 보인다. 그때 수백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맥을 자른 흔적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금도 뜸자리와 맥을 자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최근 이곳을 답사했을 때 회안대군의 후손이 세웠는지‘혈맥을 자른 흔적’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어 600년 전의 일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1, 2차 왕자의 난은 왕위 쟁탈 때문에 일어난 골육상잔이다.
그러나 지맥을 자른 것은 왕권 유지를 위한‘죽은 자와의 골육상잔’이었다. 회안대군은 살아서는 동생과의 권력 쟁탈에서 패해 평생 회한(悔恨)을 안고 유배지에서 살았다. 죽은 뒤에는 자신이 누워있는 묘소의 지맥이 끊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또다시 회한을 맛보았다.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편할 날이 없는 것 같다. 회안대군의 묘 북쪽 등성이에 있는 묘는 그의 셋째 아들 금성군 내외의 묘이다. 이곳에 있는 제각은‘광감제’라고 이름 붙였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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