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3/05 [15:57]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3/05 [15:57]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1274.고려원종 15)의 묘호는 목조(穆祖)이며 추존 왕이다. 이양무(李陽茂)의 아들로 고려 때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
1899년(광무 3)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다. 1900년(광무 4)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현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의 계좌(癸坐)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목조는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주읍지(全州邑誌)>에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은 발산(發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이라고 이른다. 발리산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현재 교동)이 있었는데, 이 자만동에 목조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다.
오늘날 오목대(梧木臺)의 동쪽 발리산 아래 목조의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이다. 목조가 강원도 삼척으로 갈 때는 27세쯤이었다. 당시는 고려 무신 정권이 한창이던 때이다.
관민(官民)이 서로 반목하던 일이 많았다. 이 때 전주의 호족 집안인 목조는 전주 주관(州官)의 시기심으로 시비가 벌어졌다.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 등이 목조와 시비가 붙으면서 병력까지 동원하려 했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에게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당시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였다.
주관과 안렴사는 목조에게 관의 명을 거절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이것이 목조 일족 전주 퇴거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결국 목조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했다. 그 뒤 수 년 만에 다시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에 가까운 덕원(德源)으로 이주해야 했다.
1235년(고려 고종 22)의 제3차 몽고군 침입의 행패가 가라앉을 무렵인 그 이듬해에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시비를 일으켰던 전주 산성별감이 강원도의 안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목조가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하여 온 지 10여 년 후인 1248년(고려 고종 35)부터 1253년(고려 고종 40) 사이에, 고려는 목조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았다.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쌍성(雙城-永興,和州) 바로 남쪽인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이 당시 영흥 북쪽의 함경도는 원나라의 속령으로서 원나라의 개원로(開院路.지금의 吉林省,遼寧省,咸鏡道 등) 정부에 속해 있었다.
1255년(고려 고종 42) 목조와 극친한 사이인 개원로 정부의 산길대왕은 원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오동천호소(斡東千戶所)란 구역을 새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목조에게 금패(金牌)를 주면서 남경등처 오천호소(南京等處 五千戶所) 구역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카치(達魯花赤)라는 관직을 겸하게 하였다.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에서 다루카치란 관직의 임무는 원나라 개원로 행정 구역인 남경 지역 내의 4성(城)을 관령(管領)하고 순찰하는 일이었다. 4성은 첫째 오동에 있는 오동대석성(斡東大石城), 둘째 오동 서쪽 남경에 있는 남경대토성(南京大土城), 셋째 오동 서쪽 120리에 있는 두문성(豆門城), 넷째 오동 서남쪽 120리에 있는 사오리대토성(沙吾里大土城)이었다.
이 4성은 주로 군인이 거처하던 곳으로 목조는 수시로 왕래 순찰했다. 특히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을 순찰했다. 1258년(고려 고종 45) 목조는 산길대왕의 영지(令旨)를 받아, 겸직으로 8개 백호(百戶.관청명-萬戶,千戶 등)를 관령하는 명령을 받았다.
1260년(고려 원종 1)에는 원나라 상서성(尙書省)으로부터 본소(本所.총본부)의 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동인(銅印)을 받았다. 1264년(고려 원종 5)에는 원나라 황제로부터 오동천호(斡東千戶)를 담당하는 선명(宣命)을 받았다.
그 뒤 수백년이 지난 후에도 전주의 시장 상가에서는“안 사도 좋으니‘안사’처럼 떠나라”라는 말이 있었다. 여기서 < 안 사 > 혹은 < 안사>는 바로‘이안사’를 가리킨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고향을 떠나라는 말이다.
이안사는 완산(完山)을 떠나 삼척(三陟)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4대 째 고손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됐다. 고향을 떠나 120년 안팎에 왕가를 이룬 것이다.‘이안사는 부득이 전주를 떴지만 크게 집안을 일으킨 것처럼 너도 그리 되라’는 내용이 함축된 말이다.
지난 2017년 4월 10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임원들은 시조 이한(李翰)공의 대제를 마친 뒤 전주시 효자동 마전(馬田)마을을 들렸다. 마전이 바로‘풍패지향(豊沛之鄕)의 원향(原鄕)’이기 때문이다. 이안사가 170호를 거느리고 전주를 떠날 당시 완산에는 8촌 이개(李開)만이 남았다.
그 후손들이 전주시 덕진동 시조 산 조경단을 보살피며 지켜 내려왔다. 개국 후 태조의 고조부 목조와 본인 태조의 고향이기에‘풍패지향’이란 이름이 붙었다. 강원도 삼척 지명에서‘척(陟)은 오를 척’자다. 이안사 자기를‘목조’로, 고손을 왕으로, 집안을 왕가로 올려놓은 셈이다.
한편 목조는 부인 평창(平昌) 이씨 사이에서 6남을 두었다. 안천대군(安川大君) 이어선(李於仙), 안원대군(安原大君) 이진(李珍), 안풍대군(安豊大君) 이정(李精),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안창대군(安昌大君) 이매불(李梅拂), 안흥대군(安興大君) 이구수(李球壽) 등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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