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과 기축옥사(己丑獄事)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4/23 [15:33]

정여립과 기축옥사(己丑獄事)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4/23 [15:33]


전북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塞墻洞)은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비극이 깃들여 있는 곳이다. 색장동은 원색장 마을을 비롯 죽음(竹陰) 마을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이곳은 은석골(隱石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축옥사(己丑獄事.1589, 선조 22년)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여 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른다.
정여립은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이다. 그는 조선시대 당쟁의 중심적 사건인 기축옥사를 불러온 장본인이다. 그리고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사망했다. 기축옥사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조작과 진실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인백(仁佰) 정여립은 전주 남문 밖 자만동(현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 한뎃벌, 전주 한벽루 상류)에서 동래정씨(東萊鄭氏) 첨정(종4품) 정희증(鄭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연도는 명확치 않으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중종-인종 연간으로 추정된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전주남문 근교에 살았다. 정여립은 청소년 시절에 익산군수였던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여 간혹 일을 처리할 정도로 영특하고도 조숙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전들은 군수보다는 그의 아들 정여립을 더 어려워 했다.
아버지는 군수ㆍ첨정(僉正, 종4품) 등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다. 정여립은 전주에서 태어났고 대동계(大同契)의 거점이자 피난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도 진안(鎭安) 죽도(竹島)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상당히 순조롭게 출세했다. 1570년(선조 3년) 우수한 성적(5등)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24세의 나이였다. 조선시대 평균 급제 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성공이었다. 그 뒤 여러 하위직을 거쳐 37세 때(1583) 예조좌랑(정6품)이 되었고, 이듬해는 홍문관 수찬(정5품)에 올랐다.
이때까지는 흠잡을 데 없는 순탄한 출세였다. 무엇보다도 정여립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이(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의 각별한 인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인(西人)의 촉망 받는 젊은 인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중년에 와서 급변했다. 1580년(선조 14년)에 예조좌랑, 1583년에 홍문관 수찬(修撰) 벼슬에 올랐으나 정여립은 당파 싸움의 틈바귀에 끼여 울적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벼슬길을 버리고 젊은 나이에 전주로 낙향했다. 그는 고향 마을에서 가까운 죽음마을 앞 파수대(把手臺)에 거처를 정한 다음 산천경개를 벗 삼으며 후학들에게 경학을 가르치는 일로 소일했다.
그 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상경한 정여립은 재차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갈수록 우심해지는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또다시 벼슬길을 버린 채 낙향하고 말았다.
낙향 후 그는 진안의 죽도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길렀고, 그의 문하생들은 그를 가리켜 '죽도선생' 이라 불렀다. 또한 그의 높은 명성을 듣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강호의 명사 및 인재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신분의 귀천을 두지 않고 사귀기 위해 그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바로 그 대동계원들이 매월 보름날 한자리에 모여 말을 달리고 활을 쏘고 창과 칼을 쓰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곳이 바로 은석골을 중심으로 파수대, 관혁봉, 만궁봉 등을 아우르는 일대이다.
정여립의 대동계는 1587년 왜구가 전라도 해안지방을 침노하여 노략질을 일삼을 때 전주판관 남언경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 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 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당시 항간에 구전되던‘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이라는 도참설로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치부된다. 그의 대동계 조직도 조정에서 그에게 역모의 혐의를 씌우는 데 결정적인 증거로 이용된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 준과 안악군수 이 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1589년 진안 죽도의 농막에서 자결한다.
정여립은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 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는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조작설로는 당시 서인의 참모로 활동한 송익필(宋翼弼)은 신분이 비천했는데(할머니가 천첩의 소생이었다) 동인이 자신의 친족을 노비로 환천(還賤- 양인이 된 천민을 다시 천민으로 되돌림)시키려고 하자 옥사를 조작해 보복했다는 견해다.
그리고 위관(委官- 사건의 추국과 판결을 맡은 책임자)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확대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기축옥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국왕인 선조였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건의 주요 쟁점마다 국왕이 깊숙이 개입해 흐름을 바꾼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여립은 43세의 젊은 나이로 불운한 인생을 마쳤다. 정여립과 기축옥사는 한국사 연구에서 여전히 숙제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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