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독일의 과거 청산에서 배워라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8/29 [16:47]

일본은 독일의 과거 청산에서 배워라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8/29 [16:47]

 
독일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다. 종전 후 독일은 철저한 과거 청산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를 극복했다. 반면 일본은 과거와의 진지한 대면을 여전히 회피하고 있다. 군국주의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군국주의 망령의 부활을 알리는 조짐이 일고 있다.
일본은 독일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지금까지도 식민지배의 과거에 대해 진정한 반성도 사과도 없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전범을 추모하는 상식 이하의 행태를 멈추지 않고 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일본의 현재와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일이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일본과 달리 독일의 경우는 성공적인 과거 청산이 국가 발전의 토대이자 원동력이었다. 독일의 수천 년 역사에서 히틀러의 집권 기간은 12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일의 학교에서는 이 기간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선동가 판별 교육 등 일련의‘정치 교육’을 중시하는 것도 나치 청산의 일환이다. 독일 학교는 마치 나치 과거와 싸우는 전쟁터와 같다. 나치의 최대 피해자인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서도 독일 과거청산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베를린 훔볼트대학 앞 광장 한가운데에는“책을 불태운 자는 언젠가 인간을 불태울 것”이라는‘유대인 시인’하인리히 하이네의 경고가 새겨져 있다. 훔볼트대학 본관엔‘유대인 철학자’카를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가 한복판에 붙어 있다.
독일 문화의 상징인 괴테의 동상은 시민공원 한 모퉁이에 서 있다. 반면 베를린의 중심 브란덴부르크 문 가장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대규모의 유대인 추모공원이다. 베를린은‘유대인의 도시’를 방불케 한다. 도시 전체가 나치 과거에 대한‘거대한 반성문’이다.
독일은 제2차 대전 후 주변국과 역사 대화를 끊임없이 해 왔다. 특히 프랑스와 폴란드를 비롯한 나치 점령하의 각 지역에서 과거 청산을 꺼내 들었다. 과거 독일이 자행한 잔학한 행위와 공포를 줄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밝혔다.
결국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서독의 노력은 주변국의 신뢰 회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동·서독이 통일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피해 국가였다. 전쟁으로 600만 명의 인구가 희생되었다.
국민 100명당 22명이 희생된 것이다. 독일은 과거 역사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장섰다. 먼저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나섰다. 화해하고 사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민당 정권 동안에는 보수적인 외교 노선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이 문제는 브란트 수상이 적극 나섰다. 소련과의 협상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폴란드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실무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서독은 폴란드가 관심을 갖고 있는 국경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독일에 대한 공포와 불신감 제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폴란드와 외교 관계 개선을 위한 작업은 둑비츠 외무부 동유럽국장이 전담했다. 독일이 오데르 - 나이세 국경선을 폴란드 서부 국경선으로 인정함에 따라 1970년 12월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서명을 위해 브란트 수상은 12월 6일부터 8일까지 공식적으로 폴란드를 방문했다.
그는 조약에 서명하기 전 공식적인 외교 행사로 바르샤바 근교에 있는 유대인 학살 묘비 탑에 헌화했다. 그는 탑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 치하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했다.
브란트 수상이 유대인 묘비 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흐느끼는 광경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독일의 정치 지도자가 진실로 폴란드에 사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독일의 과거 청산과 화해의 노력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브란트 수상의 화해 노력과 바르샤바 조약은 폴란드와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1970년 12월 7일에 체결된 바르샤바 조약은 희생과 불행으로 얼룩진 양국 관계를 종식했다.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양국 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는 1975년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평화안보회의 정상회담이다. 슈미트 수상이 폴란드 대표에게 차관 제공을 약속하면서부터다. 서독 정부는 폴란드에게 나치 시대 때 독일에서 강제 노역한 폴란드 근로자들의 연금으로 13억 마르크를 지불했다.
경제 차관으로 13억 마르크를 제공하기로 했다. 차관과 연금 지불을 위한 실무자 협상은 곧바로 진행되었다. 1975년 10월 9일 바르샤바에서 차관 제공에 관한 최종 서명이 양국의 외무부장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독은 차관 협정에 의해 10억 마르크를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동안 분할 지불하기로 했다.
이 차관은 폴란드의 경제 발전을 위해 2.5퍼센트의 이자로 제공되었다. 폴란드 정부는 1980년부터 20년 동안 분할 상환하기로 했다. 서독 정부가 폴란드에 제공한 금리 2.5퍼센트의 차관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제공한 5퍼센트에 비하면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는 폴란드가 나치 시대 가장 큰 피해 국가였기 때문에 양국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결정한 것이다. 서독은 차관 제공을 위해 일반 시중 은행에서 연금리 3~4퍼센트의 대출을 받아 폴란드에게는 2.5퍼센트의 차관을 제공하고 차액은 국고에서 지급했다.
폴란드가 요구한 액수는 아니었지만 차관 문제와 나치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폴란드는 독일인 이주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성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서독 정치인들은 폴란드를 방문할 때마다 독일인 이주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결국 1982년까지 이주민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폴란드 국내 정치가 점차 민주화되어 감에 따라 양국 간의 관계는 더욱 발전하였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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