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근대문화유산 속에 담긴 이야기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8/25 [05:56]

익산 근대문화유산 속에 담긴 이야기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8/25 [05:56]

 

지난 2015년 7월 익산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부여, 공주, 익산으로 이어지는 백제역사유적지구가 2015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역사유적으로서의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12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됐으며 등재 후 시간이 지나면서 익산은 고도(古都)로서의 명성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지역에는 고도 백제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수탈과 아픔의 역사 또한 간직하고 있다.

넓고 풍요로운 곡창지와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을 이용해 일본은 우리지역을 수탈의 최적지로 삼았으며 당시의 창고건물 및 일본식 가옥 등의 아픈 역사의 현장은 아직까지 우리시에 산재돼 있다.

그 역사를 되새겨 교훈으로 삼고자 일제 강점기 시대의 문화유산들을 따라가 봤다.

 

 

# 근대 농업 수탈의 전초기지,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실 및 창고

익산역 앞 문화예술의 거리 안쪽으로 도보로 10분 남짓 걸어가다 보면 빨간 벽돌의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은 일본인 농장 지주들이 쌀 생산량을 늘리고자 창설한 익옥수리조합의 사무소 및 창고로 사용된 건물로서 서양식(르네상스의 팔라죠 양식)으로 1930년에 지상 2층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다.

정면 중앙의 출입구와 위쪽 창호 부분은 테두리에 꽃잎무늬 형상의 인조석으로 치장해 붉은 벽돌과 대비를 이루고 있고 맨사드 지붕 등 독특한 당시의 건축기법들을 보여주고 있다.

토지 개량과 수리 사업을 명분으로 설립돼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를 부담시켜 지역 농민을 몰락시키는 등 일제에 의한 우리나라 근대 농업 수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건물이지만 애석하게도 건축 및 기술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아 건축공학도들도 즐겨 찾는 곳이며 지금까지도 그 견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해방이후 전북농지개량조합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이전하면서 빈 건물이 됐고 십 수 년 간 폐허로 방치되던 건물은 2005년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 일제강점기 농업 수탈을 말하다, 구 일본인 가옥

춘포역에서 춘포면행정복지센터를 지나가다보면 이국적인 느낌의 한 가옥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가옥은 과거 일제강점기 호소카와 농장의 관리인이었던 일본인 에토가 1940년경 농장 안에 지은 2층의 나무판자를 잇대어 지은 일본식 가옥이다.

당시 이 가옥을 포함한 춘포지역의 엄청난 규모의 농지는 일본에서 건너온 호소카와가의 농지였으며 그 규모는 당시 호남지역에서 세 번째였다고 한다.

춘포지역 3분의 2 이상인 1,000명 이상이 호소카와 농장에서 소작을 했고 지명 또한 원래 지명인 춘포에서 넓은 뜰 이라는 뜻의 ‘대장촌’으로 바뀌게 되며 아직까지 주변지역에 ‘대장’이라는 지명들이 간혹 사용되고 있다.

구 일본인 가옥은 대표적인 호남지역 농업 수탈 지역이었던 춘포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팔작지붕에 일식 기와를 사용한 이 건물은 편의성 때문에 내부는 일부 수리 및 개조가 됐지만 전체적으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지역사적, 건축적 중요한 가지가 있는 유적이며 현재는 등록문화재로 등록이 돼 있다.

 

 

# 시간의 흐름을 기억하다, 구 만경교

차를 타고 익산 목천동에서 김제 백구면 쪽으로 넘어가다 보면 현 만경교와 대비되는 구 만경교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우리지역의 곡물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928년 2월에 준공했으며 일명‘목천포 다리’로 불리며 1990년까지 무려 62년간 익산과 김제를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끊임이 없었던 곳이다.

익산과 김제를 넘어서 전주와 군산까지도 접근성을 높여준 이 다리가 전국 최초의 포장도로였다니 어쩌면 큰 명예를 지닌 것 같기도 하지만 이는 1920년부터 일제에 의해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이 본격화됨에 따라 우리지역에 나는 수많은 쌀과 농산물들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군산항까지 실어 나르던 비운의 다리이기도 하다.

만경교는 이러한 수탈의 아픔도 가지고 있지만 기나긴 시간 동안 우리지역 주민들의 교류통로가 됐던 지역의 추억이 담겨있는 장소다.

1990년 구만경교 옆 새로운 만경교가 놓이면서 그 쓰임은 동네 주민들에게만 간간히 이용돼 오다가 2015년 6월 세월의 흔적을 속이지 못하고 노후와 안전사고의 위험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전면 철거를 하지는 않고 다리 양쪽 끝부분을 새롭게 정비해 만경교의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최두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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