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남원 정령치鄭嶺峙峰(1,172.0m)

삼한시대 마한의 정 장군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았던 곳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8/28 [05:51]

백두대간 남원 정령치鄭嶺峙峰(1,172.0m)

삼한시대 마한의 정 장군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았던 곳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8/28 [05:51]

▲ 정령치 백두대간 안내판     ©

 

 

<개요와 자연경관>

 

정령치는 정장군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에 대비하여 지켰던 곳이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는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정 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지키해서, 정령치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고 나와 있다. <<한국 지명 총람>>에는 정령치는 달궁에서 주천면 고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정장군이 지키던 고개였다. 황령골은 달궁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황 장군이 달궁을 지키던 고개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휴정休靜<<황령기黃嶺記>>기록에 의하면, “소제昭帝 3(B.C 84) 마한이 진한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에 도성을 세우고 황 장군과 정 장군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는데 황장군은 황령을 수비하고 정 장군은 정령을 수비하였다.”고 한다.

 

▲ 정령치 개령암지 이정표     ©

 

 

<<조선환여승람>> (남원)에는 정령치는 운봉 남쪽 남원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다. 마한馬韓 효왕孝王 30년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 도읍을 반야봉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황, 두 장수에게 왼쪽과 오른쪽 고개를 지키라하였다. 여기에서 비롯된 이름이 정령鄭嶺과 황령黃嶺이라고 한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정 장군이 지키던 정령치는 알려졌으나, 황 장군이 지켰던 황령과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기록된 황령암과 황령은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남원의 산하> 답사단과 가야문화연구소 곽장근 군산대 교수가 현지를 답사한바, 마한의 궁궐터인 달궁과 황령암 터가 <<한국 지명 총람>>에 기록된 황령골 위의 고개, 즉 매막봉 부근으로 짐작된다.

 

▲ 정령치 개령암지 마애불상     ©

 

 

정령치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설화와 전설이 전해져 온다. 마한의 궁궐이 산내면 달궁에 있었는데 마한 후기에 정 장군이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기 때문에 바위에 그 초상을 새겼다는 전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은사 사적기>>에는 불상 군 주변에 개령암開嶺菴이라는 신라 암자가 있었는데 이는 신라 헌강왕(875)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나와 있다.

 

▲ 정령치서 본 남원시내     ©

 

 

<산경山經과 수경水經>

1769년경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산경표>>의 우리전통지리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로 고찰해 본 정령치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렇다.

우리민족의 정기가 서린 백두산 백두봉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무주 덕유산, 장수 할미봉, 육십령을 지나 영취산에 닿는다.

 

▲ 정령치서 본 견두지맥     ©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금남호남정맥을 나누고 남쪽으로 뻗어가며 백운산, 삼계봉(연비지맥 분기), 봉화산, 감투봉, 매봉, 복성이재, 아막성산, 청계산, 시리봉, 산불산, 방현(황산분맥 분기), 무덤산, 고남산, 방아산, 장봉, 여원치, 주지봉, 갓바래봉, 수정봉, 덕운봉, 큰 고리봉을 지나 정령치를 일으킨다.

정령치의 물줄기는 남쪽은 구룡계곡과 요천을 통하여 섬진강에 합수되고, 동쪽은 만수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와 산내면 덕동리의 경계다.

 

▲ 정령치 생태습지     ©

 

<지리적 위치>

지리적으로 정령치의 북쪽은 큰 고리봉과 달궁계곡, 서쪽은 남원시가지, 동쪽은 노고단, 전북의 최고봉인 반야봉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의 연봉, 남으로는 성삼재와 왕시루봉이 다가온다.

 

 

▲ 정령치서 본 만복대.천복대     ©

 

<주변문화와 인문지리>

<<남원의 마을유래>>, <<한국 지명 총람>>, <<용성성지>>, <<운성지>> 등으로 살펴 본 정령치 주변문화와 인문지리는 이렇다.

고기리 고촌高村마을은 본래 남원군 상원천면 고촌리高村里 지역으로 고촌이라고 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고촌리와 내기리가 병합되어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라 하였다.

1680(숙종 때)에 경주 이 씨가 영남지방으로부터 고촌마을에 옮겨와 살았고 밀양 박 씨, 달성 서 씨 등 여러 성 씨가 모여 마을이 되었다.

1950년까지 130호에 달하는 주천면에서 최대의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마을이 모두 타버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공산군 잔당들이 지리산에 남아 마을로 내려와 행패를 부렸다. 공비들이 완전히 소탕된 뒤 흩어진 주민들이 마을로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였다.

풍수지리상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으로 쇠구시, 송아지바위, 젖줄등의 지명이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송아지가 누워있는 것과 같으며 위에는 쏘가 있고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흘러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 정령치서 필자부부     ©

 

 

<지리적 위치>

지리적으로 정령치의 북쪽은 큰 고리봉, 북동쪽은 세걸봉, 바래봉, 덕두봉이 용틀임한다. 동쪽은 마한의 왕궁인 달궁과 황령암를 품은 점등봉과 매막봉 너머로 영원봉과 지리산 연봉들이 첩첩하다. 남쪽은 만복대와 작은 고리봉, 서쪽은 견두지맥의 견두산 줄기가 춤을 춘다.

 

▲ 정령치에서 남원산하 답사단     ©

 

 

<문화유적과 명소>

 

[황령암 터, 정령과 황령]

서산대사의 <<지리산 황령암기>>의 서두로서, 황령과 정령의 실체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달궁의 역사가 탄생하는 기록이다. "황령 남쪽에 황령암을 세웠다" 는 기록이 있다.

<<용성지>>에는 지리산 첫 기슭에 있다. 모두 지극히 험준하다. 소나 말도 통하지 못한 곳으로 남원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옛날 승려 청허당의 황령에 대한 기록으로서 일컫기를 옛날 한나라 소제가 있었는데 ...(중략)...성이 퇴폐되고 성이 헐리어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그 이른바 도성이라 한다면 세상에 전해오는 달궁 터다. 이 두 재의 안에는 긴 골짜기가 있는데 가운데는 옛날 남원의 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소속한 땅이다.”고 나와 있다.

 

▲ 정령치에서 남원산하 답사단     ©

 

 

<산행안내>

o 1코스: 정령치-만복대-고리봉-만복대정령치(8.0km, 3시간 30)

o 2코스: 정령치-세걸산-세동치-부은치-바래봉-운봉 용산리 주차장( 14.0km, 7시간)

o3코스 : 성삼재-작은 고리봉-만복대-정령치-큰 고리봉-고기리 가재마을(12.0km, 6시간)

 

 

<교통안내>

o 광주대구고속도로 지리산나들목-인월(60번 도로)-대정삼거리(861번 도로)-달궁삼거리-정령치/ 달궁삼거리-성삼재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24번 국도)-요천삼거리-운봉(60번 도로)-고기리 삼거리-정령치-성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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