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구룡분맥 장백산長白山(장법산, 장봉산456.6m)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9/17 [15:12]

백두대간, 구룡분맥 장백산長白山(장법산, 장봉산456.6m)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9/17 [15:12]

  

▲ 도로에서 본 장백산.     ©

 
 <개요와 자연경관>
  장백산은 주장봉망이란 명당이 있어 장봉산이 되었는데, 그 뒤 장백산 또는 장법산이 되었다고 한다. 장백산 자락에 있는 초동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영천 이 씨 충절공과 한양 조 씨 산서공 조경남 의병장이 의병을 모아 거병할 때 장백산과 여원치에 포진하여 합동작전으로 운봉을 거쳐 백암방을 침공하는 왜적을 물리쳤던 곳이다.
  초동마을의 동쪽은 장백산, 남쪽은 궁장동, 서쪽은 교룡산, 북쪽은 무동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자연 요충지로 최상의 피난지로 알려졌다. 이에 명당 터라 믿고 영천 이 씨 일가친척을 비롯한 휘하 의병들과 함께 마을을 형성하였다.
  궁장동弓藏洞은 임진왜란 때 조경남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들이 활을 저장해 두고 왜적을 물리쳤던 곳이다. 남원문화원에서 궁장동(궁장현)이란 표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사라졌다고 한다.
  장백산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과 이춘절李春節이 연락을 주고 받았던 봉화대 터가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장기를 게양했다하여 마을청년들이 파괴시켰다고 한다.
 의충사義忠祠는 임진왜란(1582-1597년) 때 나라를 지킨 조경남 의병장과 의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 훼손된 장백산 오름길.     ©

 
 <<남원지>>에는 “장백산은 주천면과 이백면의 경계에 있으며 주천면 쪽에 미륵정이 있다.”고 나와 있다.     
 <<한국 지명유래집>>에는 “ 장백산은 남원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은 지리산에 이어진다. 산 정상에서 남원 시내와 요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원천천이 발원한다. 이 산에 주장봉망이란 명당이 있어 장봉산이 되었고 그 후에 장백산 혹은 장법산이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백산은 장법산이라 기록 되었으며, 부의 동쪽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 지명 총람>>에 “장백산(장법산)은 이백면 초촌리와 주천면 은송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나와 있다.

 

▲ 장백산 정상에서 필자.     ©

 

 <산경山經과 수경水經>
   1769년경 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우리 전통지리서인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도 고찰해 본 장백산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렇다.
  우리 민족정기가 서린 백두산 백두봉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전북 무주의 삼도봉, 덕유산, 영취산, 백운산을 지나 남원 땅의 백두대간 시작점과 연비지맥 분기점인 삼계봉에 닿는다.
 삼계봉에서 백두대간은 동쪽으로 연비지맥을 나뉘고, 봉화산, 투구봉, 매봉, 아막성산, 청계산, 시리봉, 산불산, 무덤산, 고남산, 수정봉을 지나 덕음봉(움막)에 닿는다. 덕운봉에서 서쪽으로 나뉜 구룡분맥이 구룡봉, 석구지(솔정자)를 지나 장백산을 일으킨다.
  장백산의 물줄기는 요천으로 흘러든다. 장백산의 행정구역은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와 주천면 은송리와 경계를 이룬다.

 

▲ 은송에서 본 장백산.     ©

 

<지리적 위치>  
 지리적으로 장백산의 북쪽은 남원의 동쪽을 수호하는 청룡산 너머로 임금을 상징하는 만행산 천황봉, 북동쪽은 백두대간의 고남산이 지켜준다. 동쪽은 백두대간의 덕운봉과 수정봉, 남동쪽은 솔정자봉 너머로 정령치가 에워싸고 있다. 남쪽은 견두지맥의 견두 산줄기, 서족은 교룡산과 천황지맥의 풍악산이 다가온다.
 

▲ 이백 효촌서 본 장백산.     ©

 
<주변문화와 인문지리>
 <<한국지명총람>>, <<남원의 마을유래>>, <<디지털남원문화대전>> 등으로 살펴본 장백산 주변문화와 인문지리는 이렇다.
  본래 남원군 백암면 초동리 지역으로 푸르리 또는 초동이라 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 때 백암면의 오촌리 일부가 병합되어 초동과 오촌의 이름을 따서 초촌리라 하고 초촌리에 편입되었다.
 초동마을은 본래 주변이 푸르고 물이 맑아 ‘푸르리’라 불렀으나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풀 초草를 쓰는 초동草洞이 되었다. 초촌리는 초동과 오촌의 이름을 따온 지명이다. 초동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영천 이 씨 충절공과 한양 조 씨 산서공이 양병을 모아 거병할 때 영천 이 씨는 장백산, 한양 조 씨는 여원치에 포진하여 합동작전으로 운봉을 거쳐 백암방을 침공하는 왜적을 물리쳤다.

 

▲ 장백산 정상 임평선 대장.     ©

 
 그 뒤 이곳이 동쪽은 장백산, 남쪽은 궁장동, 서쪽은 교룡산, 북쪽은 무동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자연 요충지로 최상의 피난지요, 명당 터라 믿고 영천 이 씨 일가친척을 비롯한 휘하 의병들과 함께 이곳에 남아 마을을 형성하였다. 오촌마을은 자래울 또는 오촌이었다. 부친의 묘를 쓰기 위해 마을 앞 당산의 땅을 파던 연안 이 씨는 땅속에서 바위가 나오자 그 바위를 깨뜨렸다. 그러자 바위 속에서 자라 한 마리가 기어 나온 후 물이 솟았다고 한다.

 

▲ 장백산 가는 도로 이백·주천 경계.     ©

 
 연안 이 씨는 묘를 다른 자리로 옮기고 물이 솟은 자리에 우물을 만들었다. 그 뒤 자라가 나왔다하여 자라울, 자래울, 오촌鰲村으로 불렀다. 그러나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자라 오鰲를 다섯 오五로 바꾸어 오촌五村이라 하였다.
 오촌은 삼국시대 백제 관할이었던 초리 혹은 터서리라는 마을이 무동산舞童山의 동쪽 중심으로 있었다. 그러나 660년 신라의 삼국 통일로 백제가 멸망하자 초리에 살던 백제 유민들은 망국의 한을 달래며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옛 마을은 없어지고 농경지인 서당들 또는 터서리들로 변했다고 한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연안 이 씨가 난을 피하여 장백산자락의 오촌마을을 천혜의 요충지로 여겨 정착하였다.

 

▲ 장백산 입구.     ©

 

<문화유적과 명소>
 [장백산 주변유적 ]
  초동리 뒷산인 장백산에는 의병장 이춘절이 사용했던 봉화대 터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장기를 게양했다 하여 마을 청년들이 파괴해 버렸다고 한다. 초촌리 산 211-1에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시 이백면 지역에서 공비 토벌로 산화한 51위 호국 영령의 넋을 추모하고 그 얼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1978년 4월 15일 건립된 충혼비가 있다.

<산행안내>
o 1코스: 외송(17번 도로)-(1.5)장백산-(1.5)외송(17번 도로), (3.0km, 1시간 30분)

<교통안내>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고죽교차로(19번 국도)-척문리(15번 도로)-채곡 삼거리(17번 도로)-외송(17번 도로)
 o 남원(730번 도로)-주천면소재지(60번 도로)-양호정(17번 도로)-외송(17번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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