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금성(金城)산성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11/06 [06:08]

담양 금성(金城)산성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11/06 [06:08]

 

 

10월 마지막 날 안개 짙은 이른 아침 도로 좌우편에 하늘을 찌를 듯 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이 곧게 뻗은 포도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금성산성은 고려사절요에 언급,1380(고려우왕6)경에 축조된 주로 왜적을 막기 위한 성곽으로 1991824일 대한민국 사적 제353호로 지정된 금성산성을 찾았다. 조선 태종 9(1409)에 허물어진 성을 다시 쌓은 후 1610(광해군 2)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성도 함께 축조하였다. 광해군 14년에는 내성 안에 관청을 건립을 하고 효종 4(1653)에 성 위의 작은 담(여장)을 수리하면서, 전반적으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성산성의 연대봉(603m)을 주봉으로 북동쪽 시루봉(525m)과 남서쪽의 노적봉(439m)서쪽에는 철마봉(484m)으로 이어진 성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며 성안은 분지로 되어 있는데, 수목이 우거진 풍부한 식수와 훈련장소와 상당한 백성이 난을 피해 살 수 있을 만한 천연 요새지다. 1894년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이곳에서 일대 접전을 벌였는데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동·서·남·북문의 터가 남아 있으며 보국문과 충용문이 세워져 있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 이름이 보국문(輔國門)라 씌어 있는데, 보국사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걸고 싸웠던 동학혁명군과의 뜻을 같이한 문이라 생각된다. 금성(金城)산성이란? 또 다른 해석으로 금성은 수도를 말하며 크다의 뜻을 지닌 금()자는 신라의 수도 경주 금성을 일컫기도 한다. 금성산성의 특성은 난을 피하기 위해 담양고을과 순창군과 주변고을 백성들이 남부여대(男負)식량과 생활도구를 싸 짊어지고서 성안으로 들어가 적과 상당한 기간을 버티며 싸우게 되는데 이를 입보((入保)산성이라 한다.  산성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 1237(고려 고종 34)에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라고 하면서 봉기한 이연년(延年)이 담양군과 원율현()을 거점으로 세를 과시하며 무리를 불러 모아 촌락을 노략질하였는데 원율현에 위치한 금성산성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1256(고종 43)에는 몽골의 차라대 군대가 담양에 주둔하였는데, 이 때 금성산성은 담양, 광주 등 주변 지역민의 입보산성으로 가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외성과 내성의 2중성으로 되어 있는데, 성곽의 높이는 3m 이내이며, 성벽에 사용된 돌은 화강암 이외에 특이하게도 주변의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문터는 본성에 동서남북 4곳이 있고, 내성 2, 외성 1곳 등 모두 7곳이 있다. 4대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은 서문인데, 서문과 동문에는 2중으로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서문 남쪽에는 성벽을 3m 정도로 만든 대형 수구(水口)가 있다. 건물터는 모두 16곳으로 확인되었다. 담양금성산성 내성에는 성을 통괄하는 별장(別將)이 지휘관이 되며, 동헌과 화약고,진리청,승대장청,연환고, 소금과 간장을 보관하는 창고 등과 백성이 기거할 집까지 시설하여 장기적으로 농성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금성산성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외벽은 돌로 쌓는 편죽식이며 성문 내외벽은 돌로 쌓은 협축식이다. 일반적인 성은 성 높이가 같지만 금성산성은 자연 암석의 높낮이를 이용한 성의 높이가 계단식으로 일정치가 않다. 또 다른 금성산성은 전라남도 제일의 식량의 보고와 무역이 번화한 항포구였던 영산포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錦城)인데 같은 뜻으로 여겨진다. 나주의 금성산성은 나주시 향교동의 금성산에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무진주(武珍州:지금의 광주)를 근거지로 하여 나주를 접수하려다가 고려의 왕건(王建)이 해주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거쳐 영산포에 상륙, 금성산에서 접전하였다는 사적지로써 성벽을 축조한 연대는 확실치 않다. 또한 고려 현종 때 거란(契丹)이 침입하여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강감찬(姜邯贊)장군의 제의로 현종은 배를 타고서 나주까지 몽진하여 이곳에서 난을 피하였다. 4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석축한 것으로, 동쪽으로 노적봉(露積峰), 남쪽에는 다복(多福), 서쪽에는 오도(悟道), 북쪽에는 정녕(定寧)이 있는데, 남 ·서 ·북변은 험준한 비탈을 이루고 있어, 성 밖에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없게 된 천연요새다. 조선조 초기에 나주 금성산성에 별장(別將)을 두었으며, 당시 나주 금성산성의 둘레는 2,946척에 달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장성(長城)의 입암산성(岩山城)을 두면서 금성산성의 별장을 폐지하였다. 격전을 벌였던 임진왜란 등 역사상 패하거나 점령당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나주 금성산성이 지금은 거의 파괴되고 재개발되면서 당시 산성의 규모나 축조공법과 기술 등을 알아볼 길이 없다. 이에 반해 담양 금성산성은 호남의 3대 산성으로 성위에 오르면 담양호와 순창 강천산과 정유재란 때 김덕령 의병장의 부인 흥양 이씨가 왜놈에게 쫒기다가 암벽에서 순절한 추월산이 눈앞에 보인다. 충용문을 지나 약수터의 물 한 모금은 참으로 생명수 같은 단물이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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