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강에 핀 꽃 나주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1/05/28 [11:03]

영상강에 핀 꽃 나주

새만금일보 | 입력 : 2021/05/28 [11:03]

 

 

나주의 역사는 마한 이전으로부터 시작된 고도(古都)로 나주의 옛 이름은 금성(錦城)이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산천을 원류로 350리 물길 굽이굽이 목포앞바다까지 흐르는 영산강은 전남의 젖줄이다. 내륙 깊숙이 황포돛대를 펄럭이며 거슬러 올라와 큰 시장이 형성된   남도 최대의 강과 바다가 이룬 도시였다. 나주목사의 관아 금성관(錦城館유형문화재2)은 서울 다음으로 큰 규모인데, 임진란 때 김천일 의병장이 금성관 망화루에서 의병을 모아 출정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중삼문,내삼문을 거쳐야만 금성관에 도달하게 된다. 나주는 배산임수(背山)로 뒤에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금성산과 앞에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어 작은 서울, 소경(小京)이라 부르는 한양의 축소판으로 알려졌다. 성의 둘레가 약 4km의 나주읍성은 영산강 나루터에서 몰려드는 번화한 동점문(東漸門)과 서울의 숭례문과 닮은 남고문(南顧門), 서성문과 복원중인 북망문 4대문이 있다. 일제는 우리의 문화유산인 금성관을 군청사무실로 사용했다는데 관아 터가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 백제가 망한 뒤 후백제 견훤왕과 왕건이 나주를 두고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는데 나주물산객주 호족과 해주의 거상들이 왕건 편을 들게 되니 견훤왕은 나주를 포기하고 완산주 지금의 전주에 터를 잡았다. 왕건이 목이 말라 물 깃는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했는데 표주박에 버들잎을 띄워 준 우물 ‘완사천’에서 이뤄진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딸로 장화왕후가 되어  2대 혜종왕을 탄생케 한 어향(御鄕)이기도 하다. AD935년 고려 선종왕 때 전국을 12()으로 나눴는데(황주,해주,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상주,진주,전주,나주,승주)그 중에서 전라도 나주목이 물산교역이 가장 왕성했다고 한다. 또한 1018년 고려 현종 때 8목으로 축소됐는데 전라도에는 전주와 나주에 목을 두었으며 나라의 세곡 중 전라도의 절반이 나주목에서 거둬들였던 곡창지대로 임진란 때도 군량미 태반을 이곳 나주평야에서 생산 했다고 한다. 나주시내 영산포 홍어거리는 지금도 곰삭은 홍어삼합이 유명하며 유일한 내륙 등대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흥청대던 그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고속도로격인 영산포 뱃길을 차지하면 홍어의 섬 흑산도에서 목포에 이르기까지 영산강 물길을 따라 남도 다도해 해상권을 석권하는 중요 거점 지인 나주 땅은 풍요롭기 그지없는 비단 길이다. 또 한 나주역사의 진면목인 반남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금동관을 빼놓을 수가 없다. 수 십 기의 크고 작은 고분군에서는 옹관묘와 부장품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나주국립박물관에는 크나 큰 옹관 항아리가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고, 토기와 청자, 화살촉, 장검 등이 출토되어 5세기경 마한의 왕을 증명하는 증거물로는 신촌리9호분에서 금동신발과 미세한 금실로 엮은 뛰어난 세공술의 금동관(국보 제295)은 조금만 건드려도 부르르 떨며 휘황찬란한 금 조각들이 나비처럼 춤을 추는 보물급이다. 나주는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기로도 유명한 곳이다. 고려 말 정도전이 귀양을 와 나주농민과 함께하며 세상이치를  깨달아 썩어빠진 고려를 뒤엎고 이성계와 함께 새로운 나라 조선개국공신이 되기도 했다. 호남의 3대 길지(吉地)마을(전북 구태인, 전남 영암군 구림리)로 금성산 줄기의 노안면 금안리에서 태어난 훈민정음 집현전학자 신숙주(申叔舟1417-1475)와 그의 동생 신말주(申末舟)가 태어난 곳이다. 신숙주는 사육신의 하나인 성삼문과 요동을 13번이나 다녀온 절친(切親)으로 8개 외국어에 능통한 수재로 세종임금이 아끼는 인물이었지만 세조를 추종한 부귀영달을 위해 살다간 ‘숙주나물 변하듯 한다’라는 변절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신숙주의 생가 터는 대문이 잠긴 초라한 농가였다. 그의 동생 신말주는 자기형의 변절에 통탄하며 속죄하는 맘으로 전북 순창의 깊은 산골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나주가 낳은 걸출한 독보적인 문장가 백호(白湖) 임제(1549-1587)를 들지 않을 수가 없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39세의 짧은 생을 마쳤지만 그는 잘못된 시대를 비판하고 풍류남아로써 그 기개가 남달라 조정대신은 물론 국왕까지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한다. 백호가 초임지 평안도사로 갈 때 황해도 황진이 무덤가에서 사대부로써 그 당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천한 기생에게 술잔을 나누며 시 한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가 누웠는가. 홍안은 어디가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 할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그는 또 유언시(遺言詩)물곡사(勿哭辭)를 남겼다. <주위의 모든 나라가 황제라 일컫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중국에 속박되어 있으니 내가 살아 무엇을 할 것이며 내가 죽은 들 무슨 한이 있으랴 곡()하지 마라> 나그네는 해 저문 고즈넉한 영산강변을 따라 가다보니 흰 물결이 이는 느러지 강가에 물새 나는 비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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