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
새만금일보 | 입력 : 2023/03/17 [00:13]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여기서 파랑새는 청군(淸軍)을 의미하고, 녹두는 전봉준, 청포장수는 민중을 뜻한다. 국운이 기울어가는 조선조 말엽 1890년(고종27년) 동학에 입도한 풍운아 전봉준은 전라도 작은 고을 고부 땅에서 훈장으로 잠룡(潛龍)처럼 은신하고 있었다. 매관매직과 탐관오리들의 학정이 극에 달하고 민심은 날로 흉흉해져 부패한 고을 방백수령은 물론 아전까지 백성의 고혈을 짜는 것을 더 이상은 볼 수 없어 전봉준은 제폭구민 보국안민(除暴救民 輔國安民)의 기치를 걸고 분연히 일어섰다. 민비척족의 부정부패에 항거한 1882년 임오군란과 망해가는 나라를 혁신하고자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주도한 갑신개혁 3일천하의 변란이 일어나고, 궐내에서는 진령군에 봉한 무당으로 하여금 굿판을 벌여 내탕금(內帑金)을 탕진한 민비는 청군에게 자국의 백성인 동학군을 토벌하게 했는데, 천진조약에 의한 일본군이 들어와 화를 자초한 청일 전쟁의 패권다툼에서 일본이 이겨 조선은 일본 놈의 수중에 들어간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간다’라는 민요는 갑오년에 빨리 혁명을 이루지 못하면 을미년, 병신년으로 가면 실패하니 서두르라는 뜻이다. 갑오년 다음해인 을미년 1895년 녹두장군도 처형되고 왜놈의 손에 민비도 시해가 되었다. 1896년 병신년에 고종은 아라사 공관으로 피신을 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국왕의 통치 기능은 마비된다. 1592년 임진왜란 직전에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무시한 채 당파싸움만 하다가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길 뻔 했는데 이순신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나라는 다시 존속했는데, 그 후 300년 만에 결국 일본에게 강점을 당하고 만다. 난세의 영웅 전봉준(全琫準1855-1895)은 전라도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바 있는 그의 부친 전창혁(全彰爀)은 의협심이 강하여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민원을 제기했다가 심한 매를 맞고 장독(杖毒)으로 죽었다고 한다. 전봉준은 5세 때에 한학에 입문하여 13세에 백구시(白驅詩)를 지어 어려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 부친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도 있으려니와 쓰러져 가는 국운에 대한 고심을 하던 끝에 무장접주 손화중(孫和中)을 만나 국내외 정세를 논하고 동학을 알게 되어 서장옥의 휘하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를 한다. 1892년 제2대 도주 최시형(崔時亨1827-1898)으로부터 고부 접주(接主)로 임명된 전봉준은 1893년 2월 상경, 대원군을 만나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이 한 몸을 바치고자 한다’라고 했다는데, 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대원군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결의가 있었다고 본다. 나라가 풍전등화 앞에 놓여 있던 급박한 때 동학은 서학(천주교)에 반대되는 말로 한울님 이라는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사상은 사람을 하늘처럼 존중하자라는 평등사상으로 반봉건, 반외세와 부정부패한 정치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동학은 1860년을 포교 원년으로 제1대 도주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몰락해가는 경주 최씨 최치원의 후예로 양반가에 태어나 8도 강산을 10년간 유람하다가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져 영국에게 홍콩이 조차지당한 것에 충격을 받고 유,불,선의 사상을 통합한 동학이라는 종교를 창시하여 기울어가는 나라를 건지려는 큰 뜻을 품고 서구와 맞선 민족 종교로 자리를 잡았다. 조대비 4촌의 기생첩 의 아들로 태어난 조병갑(趙秉甲)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과거급제하면 가장 선호한 고부군수 자리를 조병갑은 2번씩이나 부임하여 만석보를 막아 과다 수세징수 등 학정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이에 전봉준은 1893년 11월 고부농민 40여명과 함께 탄원을 한바 전봉준을 감옥에 가두었으나 민심이 흉흉함에 조병갑은 전봉준을 풀어준다. 출옥 후 김도삼(金道三),최경선(崔景善) 등 대표자 20여명과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말 피를 마셔 같이 죽기를 맹서하며, 첫째로 고부 군수 조병갑을 참하고, 형리 아전을 징치하고, 전주성을 점령, 서울로 갈 것을 결의한 본격적인 민중봉기를 하게 된다. 다음해 1894년 1월10일에 고부관아를 쳐들어갔는데 조병갑은 이미 아전 은(殷)모 집에 피신하여 도망을 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원평, 태인, 정읍, 고창, 흥덕, 부안, 김제 등에서 운집한 수많은 동학군은 사기충천하여 3월21일에는 동진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요새 지금의 부안군 백산(白山)토성에 보관중인 관곡 4000석을 수중에 넣고 동학군 3천 여 명이 봉기를 하였는데, 흰 두건을 쓰고 죽창을 들고서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고을 방백수령들의 착취에 벌떼처럼 일어난 억압받고 배고픈 성난 백성들의 목숨을 건 봉기의 함성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들리는 듯하다.
<저작권자 ⓒ 새만금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