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 황룡촌대첩과 전주화약(2)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3/03/24 [08:42]

황토현, 황룡촌대첩과 전주화약(2)

새만금일보 | 입력 : 2023/03/24 [08:42]

 

고부민란 해결사로 부임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는 전주 한벽당에서 기생과 연락(宴樂)하고 관군을 풀어 온갖 못된 짓을 하였는가 하면, 동학군을 오합지졸로 무시 한 채 4월7일 3경에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던 관군 780명과 고종의 친위부대 보부상들은 동학군에게 몰살당한다. 정읍 황토현에서 크게 이긴 동학군은 4월19일 남하하여 장성 황룡강변에 집결한다. 이 소식을 들은 경군(京軍)은 현익호에 400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 영광 범성포에 기항하여 장성에 도착 했다. 마침 황룡강가에서 점심을 먹던 동학군에게 포를 쏘아 40여명이 죽자 4천 여 명의 동학군은 벌떼처럼 일어나 관군을 뒤쫓아 대장 이학승 등을 죽이고 포2문과 양총 등 다수의 무기를 노획한 황룡대첩으로 사기가 더욱 충천하였다. 경군 정예부대를 물리친 동학군은 그 기세를 몰아 4월27일 전주성으로 진격하여 삼천천에 주둔, 전주부 무혈 입성과정에서, 당시 전라감사 김문현의 무능력에 김학진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동학군은 보부상으로 가장하여 용머리고개 대포소리를 신호로 전주서문으로 일시에 입성하자 전주판관 민영승과 영장 임태두는 급히 4대문을 수비케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판관 민영승은 경기전의 조경묘 이성계선영의 위패와 어진을 들고서 동문으로 탈출하여 위봉진 위봉사 대웅전에 봉안을 한다. 수많은 동학군을 몰고 온 녹두장군은 무혈입성, 전주감영을 점령, 선화당(宣化堂)에 집강소(執綱所)를 차려 동학정치를 펴게 된다. 이에 놀란 조정의 민비척족인 민영준은 원세개를 만나 청군 3000명을 불러들여 아산만을 통해 상륙하자, 일본군은 7000명을 인천에 상륙하여 한성에 입성을 한다. 1882년 임오군란 시 민비를 업고서 장호원까지 도피한 양호초토사 홍계훈(洪啓薰)과 안핵사 이용태에게 동학민란을 진압하라 했는데 관군의 행패는 오히려 불씨를 더 키운, 양민을 살육하고 개나 닭을 잡아먹고 패물(貝物)을 빼앗고 아녀자 겁탈을 일삼으니 민심은 동학군편으로 쏠렸다. 초토사 홍계훈은 전주 외곽에 진을 치고서 가끔씩 대포를 날렸는데 경기전 일부가 파괴된다.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몰려들어 위기를 느낀 전봉준은 홍계훈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전주화약을 맺게 되는데, 동학군은 14개 항목에 대한 조건을 내세운다. 첫째로 전운소(轉運所)를 혁파 할 것과 토지분배와 대동미 상납전 미곡무역 금단 할 것, 통포전은 매호마다 춘추로 2냥으로 할 것, 각읍 원은 민간산지를 강제로 빼앗아 투장 말 것, 종의 문서를 불태울 것, 과부의 재혼을 허 할 것 등을 내세운바 홍계훈은 성상께 직주(直奏)하고 관의 증명서를 발급하여 동학군이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조건하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5월7일에 성립되었다. 다음 날부터 관군이 전주성에 입성하였는데, 동학군의 전주대도소는 그대로 운용되었으며 전라도 53개 군현에 농민군의 자치기관인 집강소(執綱所)를 세우는데 전봉준은 전라도 각 고을을 순시하며 격려하였다. 전라좌도 김개남(金開南) 장군은 불응한 남원부에 3천 병력을 몰고 가 일시에 쳐 집강소를 세웠으며, 지리산 운봉현 역시 3천의 병력과 함께 17세의 김봉득(金鳳得)이라는 소년장수가 지략이 뛰어나고 신기의 검술로 운봉현을 쳐 집강소를 차려 선정을 펴게 된다. 그런데 남도에서 가장 큰 나주성은 뒤에는 준험한 산과 앞에는 영산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자연 해자로 4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면 천연요새지로 나주목사는 최경선(崔景善)군과 여러 날 서로가 대처 할 뿐 집강소를 불허하니, 전봉준은 휘하 몇 사람과 같이 나주 동점문을 통해 들어가 관사 앞에 나타나니 나주목사는 크게 당황하였다. ‘나는 동학군의 대장 전봉준이다. 주관(主官)은 괴이하게 생각 말라. 군도 조선 사람이요, 나도 또한 조선 사람이다. 그릇된 국정과 외세로 인하여 나라가 존망에 처했는데, 어서 빨리 꿈에서 깨어나라’고 호통을 치니 나주목사는 전봉준의 기풍과 담력에 눌려 말 한마디 못하매 전주화약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나주목사의 순응으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서 나주성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옥에 갇힌 수 백명의 동학군을 석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엄청난 동학민란과 내외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니 조정은 김홍집(金弘集)을 국무령으로 삼고 박영효 등 새로운 집정제를 편성하여 일본의 힘에 의한 이름 하여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단발령 등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폐단인 종의 제도폐지 등 여러 가지 잘못된 관습에 대해서도 1894년 7월 30일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문벌과 반상제도(班常制度)의 혁파, 문무존비(文武尊卑)의 차별 폐지,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의 혁파, 역인(驛人)·창우(倡優)·피공(皮工) 등 천인의 면천, 죄인연좌법(罪人緣坐法)의 폐지, 양자제도의 개선, 조혼 금지 및 과부 재가 허용 등이 갑오경장의 주 개혁이었다. 사실상 고종 친위정권은 이미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나라는 풍전등화 격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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