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제례(城隍祭禮)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1/25 [00:05]

성황제례(城隍祭禮)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1/25 [00:05]


 성황제례(城隍祭禮)는 전주성황제를 의미한다. 전주성황제는 음력 5월 5일 전주단오제 때 성황굿, 단오난장과 함께 재현된다. 단오제 기간 중 열리는 전주 성황제는 전주한옥마을 교동문화마당에서 많이 열렸다.
 이날 열리는 성황제는 전주 성황신인 김부대왕(신라 경순왕) 일가 5위에 제를 올리는 의식이다. 전주 성황제 행사는 전주 주산인 승암산 견훤왕 궁터 부근에서 성황신주 받기를 시작으로 김부대왕 합동 제례 성황굿 순으로 진행된다.
 전주단오제는 전주 덕진연못에서 펼쳐진다. 천년전통세시풍속 전주단오제는 옛날 지역축제였던 성황제와 덕진 물맞이 등을 되새기는 자리다. 성황산 성황사지에서 유교식 제례를 지낸 뒤 성황산에 올라 무속식 성황제를 진행한다.
 그리고 곧바로 신목을 받들고 성황사지부터 군경묘지 앞을 지나 한옥마을, 전북대 구 정문 근처를 거쳐 덕진연못 가설 성황당에 이르는 영신행렬이 이어진다. 성황굿 한마당이 함께 한다.
 물로 몸을 씻는 전통적 물세례의 원형 덕진 물맞이도 되새긴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일반 시민들에게 무료로 막걸리를 제공하고 장터국수, 부침개, 보리비빔밥 등 옛 민초들의 장터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하는 덕진연못 단오난장이 재현된다.
 천년 역사를 지닌 전주의 성황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역사 기록으로 명확하게 등장하고 있다. 전주 성황제는 고려시대 전통의 향촌 축제였다. 전주 성황신앙이 역사적 기원은 고려 초 후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견훤왕이 전주에 후백제를 도읍한 이후 전주에는 경주계 왕족과 귀족들이 옮겨와 살았다.
 후백제 멸망 후에 그들은 고려시대 향촌 사회의 주도 세력이었다. 경주계 토호 세력들은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토호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의 가문과 신분적,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성황제를 활용하였다.
 전주 성황제를 통하여 자신들이 신라 왕경인들이며, 왕족의 후예임을 자위하였다. 신분과 권위를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알리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전주 토성집단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시에 주민들을 통제하는 한편 공동체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향촌 질서를 유지해갔다.
 

 특히 신라 56대 경순왕을 전주의 성황신으로 배향하였다는 점은 전주 토호세력들의 이해 관계와 직결된다. 후백제 하에서 왕경인이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세를 강화 유지하는 방안으로 성황제를 적극 주도하였다. 중앙 정부로서는 이를 일방적으로 규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2년에 전국 산천 성황신에게 봉작을 내린다. 전주 성황신에게 두 번째로 높은 계국백을 내렸다. 고려시대 전주 성황신의 권세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시대 호장과 향리 세력들은 지방통치 차원에서 성황제를 거행하였다.
 실제 성황신은 자연신이 아니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이나 지역 주민들이 존경하는 영웅적인 인물을 배향했다. 단순한 민간 신앙이 아닌 향촌 제례라 할 수 있다. 5월 단오절에 지내는 전주 성황제는 김부대왕에 대한 호장-향리들의 제례를 집단적으로 주관하였던 것이다.
 향촌 주민들에게는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대상인 풍요신과 고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에 대한 집단 제례였다. 성황제는 무속굿판과 풍악과 정재, 판소리, 삼현육각 등으로 유희화하는 별신굿 형태로 거행되었다.
 성황제(城隍祭)는 서낭제 혹은 당고사(堂告祀)라고 한다. 성황제는 한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서낭신)께 드리는 제사이다. 예부터 마을에 따라 공동으로 성황제를 지내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구복(救福)을 위해 지내기도 하였다. 마을 지명 가운데 서낭뎅이·서낭당고개·서낭나무·장승백이 등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예전에 성황제가 활발하게 올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인적으로 성황당에 제를 올릴 때는 해가 진 뒤 성황단이나 성황목(서낭나무) 아래에 제수를 진설하고 가정의 무병과 평안을 축원하였다. 1930년대까지는 서낭나무 앞에서 무당들이 굿을 하고, 아녀자들이 기자(祈子)하는 풍속이 빈번했다.
 서낭신의 신체는 흔히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신목(神木)과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형태이다. 이와는 달리 신목과 함께 신체나 신위가 있어서 신당(神堂)을 설치한 형태가 있다. 성황당은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은 돌무더기로, 흔히 서낭당이라고도 한다.
 돌무더기 곁에는 신성시되는 고목나무나 장승이 세워져 있어서, 이곳을 지날 때는 돌 세 개를 얹으며, 침 세 번을 뱉고 지나가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전해 온다. 성황제는 무당들에 의해 성황굿(서낭굿)으로 행해지기도 하며, 마을 전체의 행사로 유교식 제의의 형태로 올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질병이나 액운이 있을 때 이를 풀어내기 위해 간단한 제수를 진설하고 정성을 올린다. 세시의례처럼 정월 14일에 부녀자들이 횡수막이를 한다고 가족의 옷 가운데서 동정을 뜯어 제물을 차리고 신목 아래서 정성을 드렸다. 개인 제사를 올릴 때는 서낭나무에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쳐두거나, 청옥색 헝겊을 둘러놓는다.
 제물로는 시루떡·삼색 실과·북어를 놓고 밥그릇에 백미를 놓는다. 작은 상을 준비하거나 바닥에 흰 종이를 깔고 진설한다. 촛불을 켜놓고 기원한 다음 동서남북에 절하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는 소지를 올린다. 제사가 끝난 다음에는 시루떡을 떼어 나뭇가지에 북어와 함께 매어 둔다. 삼색 실과도 그대로 둔 채 집으로 돌아온다.
 전주 성황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성황제의 구조와 성격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사지(祠址)를 중심으로 전주 성황신앙의 역사와 변천도 연구해야 한다. 전통 민속인 성황제를 전승하는데 힘써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가꿔 나가야 할 때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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