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회담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2/17 [00:18]

카이로 회담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2/17 [00:18]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s)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2차례의 회담이다. 1차는 1943년 11월 22~26일에, 2차는 1943년 12월 2~7일에 이루어졌다. 1차 회담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중화민국 장졔스 총통이 모였다.
세계대전 대일전에서의 협력과 일본의 영토문제에 관해 결정하고 카이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빼앗고 한국의 독립보장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11월 27일 발표되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일본 영토문제에 관하여 내린 최초의 공식 성명이었다.
주요 내용은 ① 미국·영국·중국 3국은 일본에 대해 가차없는 압력을 가한다. ②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응징하나 영토 확장의 의사는 없다. ③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얻은 태평양제도의 박탈, 만주·타이완 등의 중국에 대한 반환, 일체의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의 구축(驅逐) 등이다. 또한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을 넣어 "한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해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은 회담이었다.
이상의 내용들은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된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졌다. 제1차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 처칠과 루스벨트는 요시프 스탈린과 테헤란 회담을 위해 이란으로 갔다가 카이로로 다시 돌아왔다.
제2차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과 루스벨트는 터키 대통령을 설득해 터키를 연합국측에 가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최고사령관으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카이로 회담은 복잡한 이해관계를 거쳐야만 했다. 중국과 영국은 특히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의견이 갈렸다. 중국은‘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한다’는 문구를 넣길 원했다. 반면 영국은‘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문구가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이 같은 주장은 러시아의 눈치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고 싶어 했다.‘자유독립국가’란 문구는 러시아의 목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실제로 영국은 러시아가 반대할 거라면서 중국의 주장을 무시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영국 측에서는‘이럴 거면 아예 한국 문제를 선언문에서 빼버리자’는 말까지 내놓았다. 중국은‘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중국은 이 문제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오래 전부터 식민국가에 대한 신탁통치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 내용은 < 포춘 >, < 타임즈 > 같은 잡지에 보도됐다. 루스벨트는 1942년 11월에‘아시아에서 해방된 국가는 자치능력이 부족함으로 교육을 통한 준비기를 거쳐 독립이 달성되어야 한다’는 기조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시정부는 곧바로 반대운동을 전개한다.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조소앙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서명을 냈고, 중국 인사들을 초청한 좌담회를 개최했다.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이 자리에서‘한국이 수십 년 동안 일제에 대한 반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한국인이 노예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증거’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제시했다.
이런 와중에 장제스가 루스벨트와 회담을 가진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임시정부는 장제스와의 면담을 요청하게 된다. 이때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김원봉 등이 장제스를 만난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의 상황은 장제스의 일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혁명당 영수 김구 등을 만났다. 그들한테 내부 단결에 힘써 달라고 권하고 격려하였고, 우리 정부가 주장하려 하고 있는 전후 조선 독립 주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했다”-『장제스일기』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임시정부와의 약속처럼 한국의 독립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카이로 회담은 이제껏 약소국으로만 여겨졌던 중국을 강대국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만큼, 장제스는 한국 문제 하나 때문에 회담을 결렬시킬 생각은 없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를 거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적절한 절차’는 한국의 자주 독립을 유보시킴을 의미한다. 독립 자체는 약속 받았으나 그 약속이 언제 이뤄질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직후 남쪽에는 미군정이, 북쪽에는 소련 군정이 들어서는 반쪽짜리 해방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장제스가 임시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을 중화민국의 위성국가로 삼을 생각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제스가 미국과 영국에게 제시한 명분은 분명 한국인의 독립운동이었다.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독립하겠다는 주장이 종종 나오는 류큐(오키나와) 독립에 대해서는 카이로 회담 당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진 바 없다. 류큐의 경우 1872년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케이스이다. 이후 완고당(왕실복원파)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으나 20세기 들어와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은 거의 사라졌다. 결국 이들은 2차 대전 종전 직후 독립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면 한국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의 맥이 끊어진 일이 없다. 결국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거론될 수 있었다. 물론 분단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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