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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입상(石佛立像)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2/22 [00:17]


석불입상(石佛立像)은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345-5번지에 있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불은 석가여래의 서 있는 모습이다. 오랫동안 머리 부분을 제외한 몸체가 땅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에 파내어, 1980년에 건립한 미륵암의 미륵당 안에 모셨다. 이 불상은 그 본 모습을 상당 부분 잃었다. 코와 손은 근래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두 어깨를 모두 가린 옷차림(통견)이다. 옷 주름은 양어깨에서 가슴과 두 팔에 곡선으로 흘러내려 다리까지 이어졌으며, 옷소매는 길게 드리워져 있다. 단판 16엽의 연화좌대 위에 세워진 여래입상이다.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대 양식인 것이다. 높이 2.6m, 어깨 너비 0.9m, 밑 너비 0.9m, 좌대 너비 1.3m이다. 오른손은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굽혔다. 원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두 손은 후대에 끼운 것이다.
머리 위에는 부처의 정수리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혹 즉 육계가 있다. 좌대에는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 즉 복련(覆蓮의 연꽃무늬 16개를 새겼다. 좌대 이하는 땅 속에 묻혀 알 수 없다. 통견의(通肩衣)의 옷주름은 양어깨부터 양팔까지 곡선으로 내려 있으며, 양다리에도 주름이 새겨져 있다.
이 입상의 조성 연대와 위치 등은 확실하지 않다. 최근에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다녀가고 있어 이런 의문점들이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는 이곳은 당초 석불리로 불리었다. 그래서 석불입상이 있는 이곳의 신 주소도 석불3길 21이다.
한국지명총람(12권 370쪽)에 따르면 석불리는 본래 전주군 부남면 지역으로 돌부처가 있어서 석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석불리라는 이름이 행정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구화리, 홍수리, 은송리, 묘동 각 일부와 난전면의 수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불리라 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석불리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그 돌부처가 있는 마을은 미륵댕이다. 이곳은 이두리골이라고도 불린다. 옛날 난전 땅에 이두리라고 하는 노총각이 살고 있었다. 늙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살림인데도 끼니를 끓일 보리쌀 한 톨이 없어 동냥질을 나섰다.
건장한 몸으로 어찌 막일이라도 하지 않고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날마다 비렁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느냐는 부성 사람들의 질책이 무서워 달산 기슭을 그저 맴돌 듯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대여섯 발이 넘는 장죽을 짚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어찌 너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서성거리는고, 인생이 불쌍하여 소원 한 가지만 들어주겠노라. 자자손손 영화를 누리고 싶느냐 아니면 당대 영화냐 둘 중에 하나만 말하라”고 했다.
이두리는 서슴없이“자자손손 뭡니까 우선 당장 배때기부터 원없이 채워 보고 싶소이다”라고 하니 이두리를 가엾게 쳐다보던 백발노인은 이두리 손을 꼬옥 잡고 한 곳에 이르더니 죽장으로 땅방아를 찧으며 하는 말인 즉 “이 곳에 조상의 뼈를 묻으라”한 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두리는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으나 하여튼 부친의 백골을 당일로 파다가 이장을 했더니 몇 해 안되어 당대에 부럽지 않은 갑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고달산 서쪽 기슭 비바람 속에 묻혀 있는 미륵불을 옮겨 세우되 상체는 일월성신(日月星神)을 받게 하고 하체는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노인의 현몽대로 했다.
일설에 의하면 괴목이 서 있는 옆구리를 뚫고 솟아났다고도 하는데 하여튼 이두리는 당대의 소원을 성취했고 미륵불은 노인의 현몽대로 옮겨졌다. 오늘날 석불리(서서학동) 괴목나무 옆 미륵불이 바로 이두리 사연에 얽힌 미륵불이다. 이두리의 무덤도 그 부근에 있다고 하여 미륵불골 또는 이두리골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이런 내용은 1977년에 발간된 전주시지 121쪽에도 나온다. 심요순 할머니에 따르면 미륵불은 그 후로도 영험한 징조를 나타냈는데 근처에 대명아파트를 지을 무렵에는 미륵불의 손과 발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의 발이 남문까지 뻗어 있었다고 하는데 남문에서 제를 지낼 때 초를 태웠더니 초가 남문 모양으로 탔다고 한다.
서학동(捿鶴洞)은 황혼이 어둑어둑 내려않을 무렵에 학들이 온화한 숲 속에 보금자리를 튼다하여, 또한 학들의 살아가는 아름다운 지역이라 하여 서학동이라 명명했다. 흑석골 고덕산 줄기 골짜기를 오르다 보면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용천소, 용천대가 있다.
지금은 용천대는 사라지고 볼품없지만 물길은 여전히 맑고, 또한 경관이 수려함은 옛날과 같다. 봄이면 이팝나무가 군락을 이뤄 하얗게 피어나는‘초록바위’는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순교지이다.
한편 미륵불(彌勒佛)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삼국의 불교 전래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널리 신봉되었다. 백제에서는 미륵삼존이 출현한 용화산 밑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신라에서는 진자(眞慈)라는 승려가 흥륜사(興輪寺)의 미륵불 앞에서 미륵불이 화랑으로 현신하여 세상에 출현할 것을 발원한 결과 미시(未尸)라는 화랑이 나타났다. 김유신이 그의 낭도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던 것 등은 모두 이 미륵불 신앙에서 나왔다.
반면에 후삼국의 궁예(弓裔)가 정치적인 계산으로 자칭 미륵불 행세를 한 것이나, 고려 우왕 때의 이금(伊金)이 미륵불로 자칭하며 혹세무민한 일, 조선 숙종 때의 승려 여환(呂還)이 자칭 미륵이라 하면서 왕권을 넘보았던 일 등은 모두 미륵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들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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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2/22 [00:17]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