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 회담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3/03 [00:47]

얄타 회담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3/03 [00:47]

얄타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종반인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의 얄타 리바디아 궁전에서 열렸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당 서기장, 영국의 처칠 총리 등 연합국 수뇌들이 모여 패전국에 대한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얄타협정은 1946년에 공표되었다.
이에 앞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독일이 할 수 있는 일은 항복의 시기를 선택하는 일뿐이었다. 3거두는 전후 문제에 대한 사전 논의를 위하여 얄타에 모였다. 중요한 것은 얄타회담이 바로 한반도 38선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얄타회담은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가정 하에서 열렸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은 지연되었고, 미국의 원폭이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뒤에 소련은 참전하였다. 소련이 참전한 지 불과 5일 만에 일본은 항복을 하였다.
일본이 패배하면서 한국은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완전한 독립국가로서의 자리를 세우지 못했다. 미국의 루스벨트가 한국이 독립국가로서 자치능력을 구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오판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 조건으로 루스벨트는 스탈린으로부터 한국 신탁통치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는 이미 신탁통치 실시에 관한 간단한 구두약속이 있었다.
루스벨트는 카이로 회담을 마치고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는 소련의 약속을 얻어내기 위해 1943년 11월 28일 이란의 테헤란에서 스탈린, 처칠과 회담을 가졌다. 루스벨트는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 40년간의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그 후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다시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한국의 20~30년 동안 신탁통치를 언급했다. 스탈린은 짧을수록 좋을 것이라고 답변하여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간단한 구두약속이 있었다. 이는 다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이어진다.‘한민족이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미․영․중․소 4개국이 한반도를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하겠다는 방안’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38도선 분할 결정된 것은 1945년 8월이다.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의 한반도 점령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직후 미국에 의해 입안되었다. 소련이 그것을 받아들여 결정되었으며, 맥아더의 일반명령 1호 공포로 공식화되었다.
미국은 1945년 8월 10일과 11일 밤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한 군사분계선으로 38선을 황급하게 결정했다. 8월 13일에는 38선 분할 안을 트루먼이 승인하였다. 8월 14일 미국은 이 사실을 소련에게 통보했고, 스탈린은 미국의 안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38선 분할 내용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구체적 절차를 명시했다.
미국은 소련이 예상외로 빨리 한반도를 장악해 가는 데 매우 놀라서 38선을 제시했을 것이다. 소련 역시 8월 11일 시작된 사할린 점령 작전이 일본의 완강한 저항으로 차질을 빚어 매우 당황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고 또 당시 진행 중에 있던 일본과의 전쟁과 그 전후 문제 처리에 있어 소련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소련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루스벨트는 처칠의 회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게 많이 양보했다. 당시 두 개의 임시정부를 갖고 있던 폴란드의 독립 문제에 있어서 루스벨트는 처칠이 지지하는 임시정부를 거부하고, 스탈린이 지지하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소련은 일본으로부터 쿠릴 열도를 얻고, 중국으로부터는 군사 기지와 그 밖의 이권을 얻도록 양해되었다.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을 실질적인 승리자로 인정한 것이다. 그 대가로 스탈린은 새로 만들어진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독일 항복 이후 3개월 이내에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여하기로 약속하였다.
루스벨트는 전후에 확고한 평화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3국의 협조체제가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얄타 외교에 대한 비판이 이미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의 처칠은 스탈린이 당시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 동유럽 일대에,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극동에 공산 세력을 확대하려고 한 점을 주시하며, 시종일관 이를 저지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당시 루스벨트가 어느 정도로 소련의 진의를 파악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조정 능력을 과신했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의 최종 승리를 보지 못한 채 1945년 4월 12일 사망하였다.
얄타회담의 최대 특혜국은 소련이었다.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대가로 미 · 영은 지나칠 정도로 양보했다. 그러나 일본의 본토 상륙전이 심각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원폭 투하로 전쟁이 뜻밖에 빨리 끝났다.
소련은 별로 희생을 치르지 않고 참전 대가를 향유할 수 있었다. 얄타회담에서는 동유럽에서도 소련의 우세가 확인되어 전후 소련의 팽창을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전후 세계의 기초가 된 '얄타체제'는 대국 중심의 분단체제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세계의 분할과 전후 냉전은 이때부터 진행됐다.
1946년에 공표된 얄타 협정은 미국에서, 특히 폴란드·독일·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루스벨트가 회담 당시 병에 걸려 무능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리고 스탈린이 유럽의 모든 인민전선 정부를 공산당에 접수시킬 계획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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