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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전투(完山戰鬪)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3/08 [00:57]

완산전투는 1984년 동학농민 전쟁 당시 동학군과 관군이 완산칠봉에서 벌인 싸움을 말한다. 전주의 명산인 완산칠봉 장군봉에는 팔각정(八角亭)이 있다. 이곳 종각 맞은 편 비석의 기단에는 "보국안민(保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이 새겨져 있다.
홍계훈의 경군과 농민군은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홍계훈은 4월 25일에야 영광을 출발하여 27일 금구에 도착하였다. 농민군에게 처형당한 선전관 이주호, 종사관 이효응·배은환 등의 시신을 수습하고,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근처에 진출한 것을 알면서도 밤이 늦었다는 이유로 금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하루 차이를 두고 농민군의 뒤를 쫓아온 경군은 28일 정오 무렵, 용머리고개를 넘어 전주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완산(完山)에 진을 쳤다. 완산은 최고봉이 해발 186m 밖에 안 되지만 전주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홍계훈의 관군 1,500여명은 건지산, 기린봉, 오목대, 황학대 등에 배치하였다. 길게 포위망을 형성하며 전주성을 에워싼 것이다. 그리고 본영은 용머리고개 남쪽 산 중턱에 설치하는 등 전투 준비를 마쳤다.
군진을 형성함과 동시에 경군은 전주성을 향해 포를 쏘아 댔고, 이에 맞서 농민군 수백 명이 서문과 남문으로 나와 완산칠봉의 경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의 전술은 지형에 불리했다. 완산전투의 첫 싸움에서 농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29일에는 농민군이 북문을 열고 나와 황학대를 공격하였으나 경군의 화포공격에 백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물러났다. 5월 1일 농민군이 남문을 열고 경군을 공격했으나 이때에도 경군의 화포공격으로 3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농민군은 관군이 쏘아대는 탄환을 피하기 위해 등에다 황색종이에 붉은 글자로 주문을 쓴 부적을 붙였다. 입으로는 탄환을 제거하는 주문‘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을 높이 외치면서 빗발치는 탄환 속으로 뛰어 들었다.
경군은 전주성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이에 농민군은 서문을 열고 나와 용머리고개의 경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화포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물러났다. 전주성을 배경으로 한 농민군과 경군의 최대의 격전은 5월 3일에 벌어졌다.
농민군은 이날 아침 10시경부터 서문과 북문으로부터 돌진하여 사마교(司馬橋: 현 다가교 자리)와 부근의 하류를 건너 유연대(油然坮: 현 기전여고 북서쪽 최고봉)를 공격하였다. 농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유연대 부군의 경군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농민군은 이를 추적하여 다가산을 점령한 후 다시 남진하여 용머리고개를 가로질러 경군의 본영이 있는 곳까지 육박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여기에서 경군 본영으로부터 대포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 용장 김순명, 아기장수 이복용을 비롯하여 500여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고 성안으로 물러났다. 이때 전봉준은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으며, 전투는 오후 6시경에야 끝이 났다.
4월 28일에서 5월 3일까지 벌어진 완산전투에서 농민군은 전력상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황토재전투, 황룡촌전투, 전주성 점령 등으로 치솟았던 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고, 궁지에 몰린 가운데 내부의 동요마저 이는 상황이었다. 3일 이후로 더 이상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 전투를 끝으로 관군과 화약을 맺어 5월 8일 농민군이 자진해산할 때까지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76-2 전주한옥마을 내에는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이 있다.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숭고한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 5월31일 세워진 기념관으로 상설전시장과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 개관한 전시실로 혁명과정을 볼 수 있는 당시 사진전시 및 동학혁명서적 등을 판매한다. 소장물로는 동학혁명 과정의 사진,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龍潭遺詞)와 최시형(崔時亨)의 동상 등 100여 종에 이른다.
한편 동학 농민 전쟁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제 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8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들 중에는 전봉준, 김개남 외에도 손화중, 이방언 등 농민군 남접의 최고 지도자들 상당수가 흥선대원군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의해 살해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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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08 [00:57]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