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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군도로(全群道路)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3/29 [00:44]
전군도로(全群道路)는 전주시와 군산시 사이 46.4㎞ 왕복 4차선으로 개설된 자동차 도로를 말한다. 전주~군산을 잇는 100릿길로 전주시와 군산시의 첫 글자만을 따서 전군도로라고 했다. 중간에 익산시와 김제시를 지나며 번영로라고도 불린다. 26번 국도인 전군도로는 '수탈의 길'로 통한다.
이 도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 포장 신작로이다. 신작로는 새로 닦은 길로써, 넓고 반듯한 길을 의미한다. 일본이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08년 전주에서 군산항 인근까지 건설했다. 너른 평야의 쌀은 전주∼삼례∼익산∼김제∼만경∼군산을 거쳐 그렇게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
전군도로는 전주, 동산촌, 대장촌, 목천포, 대야, 군산을 통과한다. 이들 지역에는 일본인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들이 산재돼 있었다. 1975년에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했다.‘번영로’라 명명할 당시, 일본 관동 지구 전북인회의 지원을 받아 6,374그루의 벚나무를 심어 벚꽃길을 조성하였다. 2002년 5월 전주-군산 자동차 전용도로 일명 산업화 도로가 개통된 이후 전군 도로는 지방도로 전락했다.
일제는 헌병들을 앞세워 도로 공사에 착수했다. 일제는 도로에 편입된 농토를 헐값으로 빼앗았다. 농민들을 윽박질러 땅을 빼앗은 것이다.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무차별 폭력이 가해졌다. 공사에 들어가자 농민들을 강제노역으로 내몰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농사는 뒷전으로 하고 공사장에 불려나갔다. 도로가 완공된 뒤 농민들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제야 비로소 왜 신작로가 만들어졌는지 이해한 것이다.
쌀을 일본으로 내가는 것이었다. 신작로를 제일 많이 오가는 것은 소와 말이 끄는 달구지였다. 볏섬을 가득가득 싣고 군산으로 줄을 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서너 달 동안은 달구지 행렬이 이삼십 리씩 이어지기가 예사였다. 그 볏섬들은 모두 군산에서 모여 일본으로 실려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자신들의 국화인 사쿠라 즉 벚나무를 도로 연변에 심었다.
도로 인근 곳곳에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은 등록문화재인 삼례 양곡 창고와 만경강 폐철도 등이 있다. 양곡 창고와 폐철도는 일제가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전 보관하거나 운반한 철로다. 특히 삼례 양곡 창고는 지금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내부 또한 당시 쌀의 신선도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시설이 잘 보존돼 있다.
1970년대까지 관내 양곡창고로 활용됐으나 이후 삼례역이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옮겨가고 도심 공동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양곡 창고로서 기능을 상실했다. 완주군은 이 창고를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예술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문화체험장으로 고쳤다. 또 1920년 건설 당시 한강 철교 다음으로 긴 교량 철교로 알려진 만경강 철교는 기능이 상실되자 한때 철거가 논의됐다. 그러나 '아픈 역사'를 잊지 않도록 보존으로 결정됐다.
개화기 이전 전주를 기점으로 한 대표적인 교통로는 전주 – 강경 노선이었다. 전주에 모인 물산은 강경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따라 내려가 인천으로 수송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9년 군산이 개항되면서는 강경을 거치지 않고 군산항에서 인천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전주-군산간의 길은 너무 좁아 물자를 수송할 수 없었다.
전주 군산 간 도로의 확장 개설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특히 전군가로에는 이미 호남평야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인 농장이 있었다. 물자와 양곡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이 도로의 확충이 매우 필요했다. 결국 1907년 5월 조선정부는 전주에 치도국 출장소를 내고 전주 군산 사이의 도로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이것은 전북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이 공사는 1908년 10월에 완료되었다. 노폭 7미터, 총길이 46.6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이 뚫린 것이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전주-강경 노선은 급격히 쇠퇴하여 강경은 크게 위축됐다. 반면 군산은 상업 중심지로 더욱 발전하였다. 일본인들은 편리한 도로망을 타고 재빠르게 진안 임실 등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하여 농지를 점유하고 쌀을 사들여갔다.
전군도로를 수탈의 길로 활용한 셈이다. 1914년 개설되는 호남선과 1936년 개설되는 호남선의 철도 역시 수탈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전주에 처음 철도가 들어선 것은 1914년 10월의 일이다. 그러나 이때의 철도는 노폭이 3척인 협괴 즉 경편철도였다. 대전-목포의 261km, 이리-군산 간 24.7km의 호남선 철도가 개설된 것은 이보다 앞선 1914년 1월이었다.
그런데 전주는 호남선 철도 구간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일제가 1936년 이리와 여수를 잇는 198km의 전라선을 개통하여 전주에 보통의 철도가 놓이게 되었다. 호남선 철도 개설에 대한 논의는 1910년 시작된다. 그러면서 노선을 어디로 하느냐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군산의 일본인 농장인 오오꾸라(大倉)와 전주의 이와사끼(岩崎) 간의 군산 경유 노선과 전주 경유 노선 간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전주의 유지들이 전주 경유 노선을 극렬히 반대하자 통감부에서는 전주도 아니고 군산도 아닌 이리 노선을 확장하였다. 대신 전주와 이리는 규모가 작은 경편철도(經便鐵道)가 놓이게 됐다. 그리고 전주의 유지들은 전주에 제대로 된 노선을 유치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최근 전북도는 전주·군산·익산·김제 등 4개 시와 함께 '번영로 벚꽃길 되살리기'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벚나무를 새로 심고 마라톤이나 사이클 등 국제스포츠대회 유치도 검토할 계획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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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29 [00:44]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