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경사당(忠景祠堂)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4/12 [09:33]

충경사당(忠景祠堂)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4/12 [09:33]
충경사당(忠景祠堂)은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성1길에 위치한 충경사(忠景祠)를 가리키다. 충경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정란(李廷鸞.1529년.중종24∼1600년.선조33)의 공적을 기려 세운 사당이다. 남고산성을 가는 길목인 전주교대에서 200여m 지점 가파른 산자락 아래 충경사가 나온다.
이정란 장군은 전주 출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문보(文父), 시호는 충경이다.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승효(李承孝)이다. 전주에 세거하였는데, 인근에 정여립(鄭汝立)이 살고 있었다. 이정란은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당시 정여립이 요직에 앉아 극력으로 방해하였다.
그래서 성균관전적·해미현감·양재찰방·개성부도사로 전전하다가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그 뒤 1589년 정여립 사건이 일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배티고개(이치고개.梨峙)를 넘어 전라도로 침입하자 스스로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부민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켰다.
당시 그의 나이 64세였다. 그런데도 군율을 엄히 하고 매일 순시를 하며 방비를 튼튼히 하니 공격의 틈을 엿보고 있던 적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태상시첨정(太常寺僉正)에 제수하여 포상하였다. 이어 군기시정을 거쳐 수원부사에 올랐고, 공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사헌부에 의하여 탄핵, 파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에 다시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하자, 수성의 계책을 제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는 성을 버리고 도망하니, 성중에서는 크게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다시 조정에 읍소하여 전주부윤이 되어 성을 지켰으며 삼도소모사가 되었다.
사후 전주의 한계서원에 배향되었고, 진안군 마령면에 사우가 있다. 그의 용기와 충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순조 때 충경공의 시호를 나라에서 내렸다. 오늘날 전주시를 동서로 가로지른 도로를 충경로로 명명한 것은 충경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충경사가 있는 곳은 최근 산성벽화 마을로 모습이 변했다. 행정안전부가 추진한 < 담장벽화 친환경 사업 > 공모에 선정된 것이다. 그 뒤 산성 담장과 건물 벽에는 갖가지 재미있는 그림들이 많다.
육군 35사단은 1984년 구한말 의병항쟁의 중심지였던 전라북도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 향토 수호의지를 고취하기 위해 부대의 애칭을“충의(忠義)”로 명명 하였다. 그 뒤 1992년 이정란 장군의 시호인“충경(忠景)”의 충성할“충(忠)”자와 효를 상징하는 공경할“경(敬)”자를 합쳐“충경(忠敬)”명칭으로 변경했다. 또한 35사단은 이정란 장군의 향토 수호 의지를 기리기 위해 장병들의 심신을 단련하는 체육관을‘이정란관’이라고 명명하였다. 영내에는 이정란 장군 동상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편 전주성(全州城)은 고려시대 공양왕 원년인 1388년에 축조된 성으로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 때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전주성은 풍남문을 제외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벽 자리는 대부분 도로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적도상으로도 성벽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다.
경원동우체국(구 전주우체국)을 중심으로 네 성문까지의 거리가 약 400~450m 정도이다. 전주천 쪽을 빗변으로 하는 뒤집어진 사다리꼴 모양의 성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북문(공북문)은 현재 문화광장 동쪽 북문오거리 자리다.
서문(패서문)은 옛 다가동파출소 (현재 완산경찰서 경목회) 건물 앞 삼거리다. 남문(풍남문)은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다. 동문(완동문)은 동문길 등용문직업전문학교 앞 사거리로 예술회관에서 홍지서림을 지나 좀 더 걸으면 나온다.
북측 성벽의 서측 방향은 영화의 거리이며 옛 KT&G 전주지점 건물 뒷 편에서 꺾인다. 동측 방향은 문화광장에서 가톨릭센터 방향으로 향하는 소로이며, 가톨릭센터 앞에서 전통문화전당 방향으로 꺾인다.
서측 성벽은 구 KT&G 전주지점 건물 서측으로 지나는 전주객사2길-충경로에 부속된 소로로 이어지다 서문 근처에서 잠시 끊어진다. 서남쪽 부분은 전라감영2길-풍남문2길을 통해 풍남문으로 이어진다.
남측 성벽은 풍남문2길-풍남문-태조로이며, 중앙초등학교와 경기전 사이의 사거리(다우랑 앞 사거리) 에서 동측 성벽과 연결된다. 동측 성벽은 충경로 남쪽에서는 경기전길이며, 충경로를 건너서는 현무2길로 이름이 바뀌어 전통문화전당 앞까지 이어진다.
전주성 사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남문의 이름은 풍남문(豊南門)이다. 이는 한고제의 고향인 풍읍 패현에서 따온 것이다. 유방이 세운 대업의 시작점이 풍패이듯이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 역시 조선 왕조의 출발지란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풍패'라고 불러 왔다.
따라서 풍패의 남쪽 문이라 하여 풍남문이란 이름이 붙었고, 서문은 패서문(沛西門)으로 불렸으나 1911년에 풍남문을 제외한 세 곳과 성벽은 일제가 시가지 확장을 핑계로 허물어 버렸다. 풍남문은 정유재란 당시 불타 없어졌다가 영조 44년인 1768년에 전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운 것인데 현재 안쪽 현판에는 '호남제일성'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매년 풍남문 종각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동고산성(東固山城)에서는 1980년 첫 발굴조사 당시 전주성(全州城)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됐다. 전주성이란 이름은 최초 건설되었던 시기에도 불렸다는 게 밝혀졌다. 동고산성은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전주 성황사 중창기(重創記)에는 "견훤이 세운 궁터로 전해져온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시기도 견훤이 완산주(전주)에 입성해 후백제를 세운 시기와 비슷해서 견훤이 세운 성이라는 주장이 현재까지 유력하다.
(정복규 기자)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전주-완주 110경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