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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성지(草南聖地)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4/19 [06:56]


초남성지(草南聖地)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마을의 전라도 천주교의 발상지를 가리킨다. 초남마을은 호남고속도로와 전주, 익산이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호남의 첫 사도이자 순교자인 유항검(柳恒儉:아우구스티노)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유항검은 1754년 이곳 초남리에서 아버지 전주류씨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권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윤지충과 이종 사촌 간, 권상연과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초 유항검은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나 벼슬길을 포기하고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과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이승훈, 정약전과 인척간이었다. 이들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1784년 유항검은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듣는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고향에서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홍낙민, 최창현, 이존창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된다. 그러던 중 1787년 가성직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낸다.
오류를 범한 가성직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윤유일이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초남리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주 신부는 그의 집에 머물며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유항검의 큰 아들 유중철(柳重哲:요한)과 며느리 이순이(李順伊:루갈다)는 1801년에 순교할 때까지 4년간 동정을 지키며 부부생활을 했다.
이들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후 10년 동안 고산, 전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복음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리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 형을 언도받는다.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같은 해 10월 9일에는 큰 아들 유중철이 순교하였으며, 12월 28일에는 유항검의 부인, 제수, 큰며느리 이순이와 조카 유중성(마태오)이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 루갈다 초남리 일기 남매 >란 전주 초남리에 설던 이순이 루갈다의 남매가 쓴 일기, 또는 그들이 남긴 서한들을 말한다. 4통의 일기와 서한이 수록되어 있다. 첫째 서한은 이순이 루갈다의 오라버니 이경도(李景陶) 가롤로가 순교하기 전 날 옥중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써 보낸 것이다. 하직 편지였다. 그는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둘째, 셋째 서한은 이순이 루갈다가 쓴 것이다. 둘째 서한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것이다. 두 언니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하나는 친언니이고, 하나는 그의 올케 즉 이미 옥에 갇혀 순교를 기다리던 이경도의 아내이다. 이순이 루갈다는 마침내 12월 28일 전주 숲정이에서 휘광이의 칼을 받음으로써 동정과 순교란 이중의 월계관을 차지하였다.
넷째 글은 서한이 아니라 일종의 일지이다. 이순이 루갈다의 동생 이경언(李景彦) 바오로는 1827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 잡혀 전주로 이송되었고, 그해 5월5일 전주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러한 경위를 이경도가 일지 형식으로 써서 남긴 것이다.
한편 이들의 시신은 신자들이 거두어 흰 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전북 김제시 용지면 제남리 바우백이에 가매장하였다. 현재는 전주의 치명자산에 모셔져 있다. 조정에서는 유항검과 같은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파가저택(破家瀦澤)’을 시행했다.
파가저택이란 큰 죄를 지은 사람의 집을 헐어 없애고 그 터에 못을 만드는 형벌을 이르던 말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연못이 남아 있다. 현재 이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는 동산동 본당에서는 1987년에 이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한 뒤 축복식을 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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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19 [06:56]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