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 전북의 모습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5/01 [00:01]

해방 전후 전북의 모습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5/01 [00:01]
전북의 만경강·동진강 연안의 호남평야(湖南平野)는 쌀 생산지로 유명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가 펼쳐진 우리나라 대표 곡창지대다. 호남지방은 대체로 전주와 광주를 연결하는 선을 기준으로 볼 때 서쪽은 저평하여 광대한 평야를 이룬다. 노령산맥에 의하여 호남·나주의 두 대평야로 갈라진다.
그 중 호남평야는 노령산맥의 서쪽 금강·만경강·동진강 유역을 차지한다. 동서 약 50㎞, 남북 약 80㎞에 달하는 광대한 평야다. 그리고 만경평야(萬頃平野)는 전라북도 김제시·익산시·군산시 일대의 만경강 하류에 발달한 평야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과거 군산은 쌀 수출 항구로, 이리는 농산물 집산지로 번창했다.
전북 지역은 농토가 많은 만큼 매우 잘 살았던 지역이다. 이런 사실은 당시 전국의 인구 분포에서도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호남 인구는 249만명, 영남은 296만이다. 서울 인구는 고작 100만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르다. 호남 인구 525만명, 영남 인구 1300만명, 경기도 인구 1200만명은 이미 오래다.
영남 인구는 크게 늘어난 반면 호남 인구는 상대적으로 조금 늘어났을 뿐이다. 호남 인구의 타 지역 유입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후에 서울권과 경기권 인구는 모두 합쳐도 호남 인구보다 적었다.
1936년 일제 강점기 때 인구분포는 경기도 2.392.296명, 충청북도 907.055명, 충청남도 1.482.963명, 전라북도 1.540.686명, 전라남도 2.416.341명, 경상북도 2.454.275명, 경상남도 2.214.406명이다. 1910년대와 마찬가지로 영남과 호남의 인구는 17~19%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쌀이 풍부했던 전북은 19세기말부터 일제 식민지 기간에 수탈이 심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장이 곳곳에 산재해 수많은 우리 농민을 소작농으로 고용했다. 일본인 농장주의 압박과 수탈은 한인 소작농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족투쟁으로까지 승화됐다.
전북지역에서는 1895년 이후 해방까지 여러 계층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농민·노동운동도 활발했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 된 대한제국 말과 일제강점 초기에는 많은 의병장들이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전북에서는 대대적인 활동이 전개됐다.
전북의 의병활동은 1906년 정읍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태인의병에서 비롯했다. 태인의병은 최익현·임병찬이 중심이 돼 잠잠하던 호남지역 의병활동에 불을 지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유생과 농민군으로 구성된 태인 의병의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의병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면서 의병활동은 조직적인 무장항쟁으로 전개됐다. 의병장 이석용은 진안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전해산은 대동창의단을 결성해 의병활동을 펼쳤다. 굳센 선비정신과 저항정신, 구국의 독립정신은 동학혁명에서 불타올랐다. 대한제국 멸망 후 의병들의 항일독립 전쟁으로 계승되어 나갔다.
전라북도는 독립운동사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해낸 지역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한말 항일의병부터 독립운동까지 전북지역의 독립운동은 매우 활발했다. 망국의 슬픔에 목숨이 다할 때까지 단식했고, 일본의 회유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우물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반대해 조국의 독립을 외치면서 이슬처럼 사라진 인물도 많다. 전북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근배 지사는 1910년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청년들을 가르쳤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청년들 사이에서 영향력 있는 김 지사를 회유하려고 '은사금'(일제가 한일합병 이후 조선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사용한 돈)을 제시했다.
그러나 김 지사는 독립운동가로서 충절을 지켰고, 일제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돌을 안고 우물에 몸을 던졌다. 전주에 있는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은 어린 나이에도 3·1운동에 직접 참여해 고초를 겪었다. 결국 두 학교는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되는 아픔을 겪는다.
전북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1919년 3월 1일이다. 기독교계 학교였던 군산 영명학교였다. 호남에서 처음 발생한 군산의 만세운동은 영명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됐다. 이후 전주와 임실에도 전달됐다. 이를 계기로 전북 최초의 만세시위가 3월 5일과 6일 군산에서 비롯됐다. 이는 호남 최초 만세시위운동이다. 그 영향은 전라도 전역으로 급파됐다. 전주·군산·김제 등 도시 지역으로 확산됐고 임실 천도교를 중심으로 순창·정읍·남원 등으로 번졌다.
3월 14일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던 군산국립보통학교의 학생 70여명은 동맹 퇴학원을 제출한 뒤 3월 23일 밤 학교에 방화한 대표적인 학생운동이다. 1919년 4월 말까지 전북에서 이뤄진 독립만세 시위는 80여 차례이며 1만3000여명이 참여했다.
전북 각지에서 전개된 3·1만세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황민화 교육이 더욱 강화된 1930년대 이후에는 비밀결사 조직, 맹휴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 자본과 기술이 철수하면서 국내 공업은 어려움에 빠졌다. 일제시대에 구축된 남농북공(南農北工)의 경제구조로 인해 남한은 공업 수요에 대한 공급이 부족했다. 군산의 경우 쌀 수출항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정체와 쇠퇴의 상황에 처했다. 국내 경제기반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철수한 뒤 기업들은 원료 구입난, 기술 부족, 판로 상실 등으로 공장 가동이 어려웠다. 상당수 공장이 문을 닫았다.
(정복규 기자)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희망 전북을 열어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