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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발표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6/16 [00:35]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 발언(井邑發言)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당시 그는 미군정기에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이었다. 정읍 환영 강연회에 임석(臨席)한 이승만은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공위(共委) 재개의 가망이 없는 경우의 남조선임시 정부수립과 민족주의통일기관 설치에 관하여 주목되는 연설을 한 것이다.
이는 향후 이승만의 정치성향을 여실히 드러내었던 발언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은 흔히 백범 김구의 '통일정부론'과 대비된다. 그러면서 이승만의 주장을 "정권욕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단독정부론은 대한민국 건국사의 핵심적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예견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국제정세에 해박한 우남은 냉전이 해소될 가능성이 희박함을 내다보고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직후 단독정부론을 제기하며 남한의 독립을 추진해 나갔다.
중국에서의 냉전이 악화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전략을 짰다. 우남은 이런 미국에 앞서 국제정세의 변화를 예견하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정책을 주도했다. 당시 해방 정국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중국의 변화를 지켜보는 '소극적 관망 '수준이었다.
반면 소련의 대 북한 정책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에 이미 '북한 지역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이런 사실을 당시 남한 정치인은 물론 미국도 몰랐다. 북한에선 '북조선 중앙은행' 창설, 조만식 등 우익 인사 배제, 토지개혁 등 남북분단을 기정 사실화하는 정책들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
이런 일련의 정책들은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소련군정기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분석해 보면 단독정부론은 결코 허물로 평가될 수 없다. 물론 이 대통령의 장기 집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나쳐 대한민국 건국의 정체성까지 폄하해선 안 된다. 단독정부론과 통일정부론은 각기의 주장이 나온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단순히 감성적 이분법으로 선악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우남이 친미 일변도였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오해다. 미국은 오히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비판하면서 김규식. 여운형 등 좌.우익 합작론자들을 지원했다. 한반도에서의 '지엽적 갈등' 때문에 미.소 관계가 악화돼선 안 된다는 것이 당시 미국의 기본 입장이었다.
한편 이승만의 정읍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한편 백범 김구는 1947년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했다. 그리고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됐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측만의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어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 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며 성명을 번복하여 발표하였다.
백범은 성명서 발표 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덕수 암살사건 당시 이승만이 김구를 도와주기를 거절하면서 김구는 단정수립에 대한 찬성을 취소하게 된다.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한 것이다.
그리고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했다. 이에 김구는 크게 분노한다. 드디어 김구는 1947년 12월 22일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한다.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한민당(한국민주당)은 1947년 12월 19일 소련이 거부하더라도 남한에 중앙 정부수립을 해야 한다고 발표했다.“삼천만 한인은 다 같이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북한에서도 남한과 동시에 유엔 한국 위원단 감시 하에 총선거가 실시되도록 협조하여 주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소련 등 6개국이 이미 유엔 한국 독립안의 보이콧을 선언하고 우크라이나가 위원단의 수락을 거부한 만큼 남북통일총선거 실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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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6 [00:35]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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