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여인 성혜림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6/28 [00:12]

비운의 여인 성혜림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6/28 [00:12]


최근 피살된 북한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의 친정은 창녕성씨 만석꾼 집안이다. 성혜림의 부친 즉 김정남의 외조부 성유경(成有慶)은 많은 재물로 남로당에 충성한 후 6.25 때 두 딸을 데리고 월북했다. 부인 김원주(金源珠)와 장남 성일기(成日耆)는 미리 평양에 보냈다. 온 가족 5명이 북으로 들어간 것이다.
부인 김원주는 진남포 태생이다. 일본 유학 후 월간 개벽지 기자로 활동하다 성유경의 후처로 들어가 1남 2녀를 낳았다. 4대 독자에 이어 성혜랑, 성혜림 등 3남매를 낳은 것이다. 성유경은 해방 이후 종로 YMCA 건너 박문서관 골목에 있는 서양요리집 백합원(白合園)을 인수하여 2층을 고급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이곳에 조병옥, 장택상 등 우익 및 남로당 박헌영, 이주하 등 좌익 거물들도 출입했다.
명륜동 3가 자택은 부인 김원주의 단골손님으로 소설가 최정희, 시인 모윤숙, 나중에 스님이 된 김일엽 등이 늘 다녀갔다. 엘리트 공산주의자 이강국도 명륜동에 살았다. 성유경 부부는 넉넉한 재력과 백합원 등을 기반으로 좌우익 사교정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부인 김원주는 사회주의 이론에 심취한 운동가였다. 남조선 민주여성동맹 문화부장을 맡아 1948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남북대표자 연석회의를 참관했다. 당시 우익에서는 김구, 김규식, 좌익에서는 허헌, 박헌영 등이 참석했다. 북측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진 등이 참석한 회의였다. 결국 김일성의 집권을 뒷받침해 준 꼭두각시 행사로 결말이 났다.
6.25가 나기 전 김원주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강동정치학원 교관으로 행세했다. 성혜림은 진명여고에 다니다가 여순반란사건이 터지자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했다가 이화여중에 편입했다. 언니 성혜랑은 풍문여중에 다니면서 학생 선동에 늘 앞장섰다.
성혜랑은 김일성대 물리수학과를 졸업하고 동기생인 이태순과 혼인하여 아들 이일남, 딸 이남옥을 낳았다. 1968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과부 신세로 전락했다. 동생 성혜림은 평양예술대를 나와 조선문학예술 총연맹 위원장 이기순(월북 작가)의 장남 이평과 결혼하여 딸 이옥돌을 낳았다. 성혜림은 1959년 졸업 무렵 영화‘분계선 마을에서’의 주연을 맡아 김일성의 극찬을 받고‘인민상’을 수상했다. 이때 김정일이 성혜림의 시동생(이기영 3남)과 친구 사이로 들락거리다가 친구의 형수(성혜림)에게 넋이 빠졌다.
성혜림은 유부녀인데다가 5년 연상이며 남한 지주계급 딸이었다. 그러나 당시 김정일은 계모 김성애와의 권력 암투기로 늘 불안감에 젖어 있었다. 배우 출신의 미모이자 5년 연상에게 위안의 품을 느꼈다. 결국 김정일은 유부녀 성혜림을 자기 품에 안았다. 1
968년 프놈펜 영화제에 참석한 성혜림이 테이블 스피치와 신문기자 회견 등에 능란한 솜씨와 지성미를 과시하자 캄보디아 국가원수인 시하누크 공이 격찬했다. 성혜림 덕분에 김정일은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1971년 5월 19일 장남 김정남이 탄생하여 김일성의 인정까지 받는다.
성유경은 어느 날 갑자기 헝가리 통조림 공장 사장이 된다. 65세 정년까지 채울 수 있었다. 부인 김원주는 김정남 양육을 핑계로 김정일의 중성동 관저에 입주하여 1994년 88세로 죽을 때까지 편안했다.
그러나 김정일과 성혜림의 밀월은 기껏 6년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투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김정일이 김영숙을 거쳐 고영희에게 몰두한 것이다. 성혜림은 우울증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다. 1974년 신병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지만 평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성혜림은 1982년 성혜랑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로 잠적했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가명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2002년 5월 사망하여 어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비석은 한글로‘성혜림의 묘’그리고 뒷면에는‘묘주 김정일’로 표기됐다. 그녀는 북한 권력자의 부인이 아니었다. 한때 독재자가 가지고 놀다 버린 여인이다.
이 무렵 성혜랑의 아들 이일남이 행방불명됐다. 14년이 지나서야 서울로 망명하여‘이한영’으로 개명하고 얼굴도 성형하여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딸 이남옥도 1992년 런던으로 탈출한다. 얼마 뒤 성혜랑은 모스크바를 탈출, 미국으로 망명한다. 부모와 자식 등 3대가 풍비박산 됐다. 외아들 이일남은 1997년 2월 15일 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아파트에서 총 두발을 맞고 숨진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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