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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동리(靑石洞里)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6/28 [00:50]
청석동리(靑石洞里)의 청석동(靑石洞)은 오늘날 전주시 다가동을 가리킨다. 지금의 다가동은 조선 말과 일제 때만 해도 청석동이라 불렸다. 그래서 행정구역 이름이 바뀐 뒤에도 다가동은 청석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다. 청석동은 전주 서문 밖에 있었던 마을이다.
그리고 다가동 우체국은 청석동 우체국으로 많이 불렸다. 마찬가지로 다가동 파출소도 청석동 파출소라고 많이 불렀다. 1945년 해방 당시 전주에는 우체국이 전주우체국을 비롯 청석동우체국, 동산우체국 등 3곳이었다. 청석동우체국은 그 뒤 다가동우체국으로 이름이 바뀐다. 다가동 우체국은 몇 년 전 우체국 통폐합으로 문을 닫았다.
청석동은 간재 전우(田愚)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간재는 1841년(헌종 7년)에 전주 서문 밖 청석동(지금의 다가동)에서 전재성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양씨 부인의 법도에 따른 태교에 의하여 출생하였다고 전한다. 태어나서 3일간을 울지도 않고 젖도 먹지 않았다. 젖이 적어 미음으로 자랐는데 여전히 울지 않았고 커서도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장난질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행동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1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가 살았다. 그의 인품과 학문은 장안에 소문이 났으며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더욱 학문을 갈고 닦았다.
그가 순동(順洞) 남문 밖에 살 때에 그 근처에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어둡고 부슬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도깨비들이 나타나 사람들이 몹시 무서워하였다. 간재가 이 말을 듣고「양명이 이기면 덕이 이루어 쓰인다.(陽明勝 德成用)」라고 한자 일곱자를 써서 나무에 붙였더니 그 후로는 다시 도깨비가 나타나지 않았다.
간재는 1882년 고종으로부터 선공감가감역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68세 되던 해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 군산도 등에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한다.
크게 한탄하며 말하기를「공자는 이런 시대를 당하면 바다로 떠나갈 것이라고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하고 1908년 망국의 한을 품고 부안의 위도(蝟島) 서쪽 왕등도(旺嶝島)에 들어갔다가 고군산(古群山)을 거쳐 마지막으로 부안의 계화도 양지말(양지리-陽地里)에 숨어 살았다.
부안 군산 등의 앞바다에 정착한 뒤 계화도(繼華島: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82세(1922년)에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간재가 숨어 살던 곳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좇아 찾아갔다.
갑자기 먹을 것도 없는 작은 섬 계화도에는 매일같이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찾아 와 숙소를 짓고 강당을 세우며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니 섬은 활기에 넘쳤다. 창북리(昌北里)에서 계화도를 건너가는 4km쯤의 바닷길은 선비들의 내왕으로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조수의 물때를 잘 모르고 건너다 익사하는 이도 가끔 생겼다. 계화도와 북창리(北昌里) 사이의 바다 중간에 활인정(活人亭)이라는 원두막 모양의 높은 대피소를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간재는 계화도에서 약 10년 동안 살면서 제자들에게 성리학 외에도 애국심과 배일사상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의 강사(講舍)에는「만 번을 겁탈하여도 마침내는 한국의 선비로 돌아갈 것이요. 나의 일생은 오로지 공문에 부치리라.」라는 좌우명을 붙여 놓았다. 일본이 망하기를 빌었으며 한 밤중이면 혼자서 계화산 매봉 꼭대기에 올라 임금님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큰절을 하고 소리내어 울었다.
하루는 일본 군함 한척이 계화도에 정박하고 함장이 간재 선생을 찾아 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는 벽에 써 붙인 좌우명을 기념으로 갖고 싶으니 달라고 하였다. 간재가「너희 왕은 그 애비를 죽인 죄인이요.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제 군왕을 죽인 죄인이므로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거늘 무엇이 부족하여 세계평화를 짓밟는 침략 행위를 하느냐. 당장 이 강토에서 모든 일인을 철수시키라는 나의 뜻을 너희 왕에게 전하라. 이것은 우리 황제의 뜻이요. 우리 온 국민의 뜻이다. 그리고 이 글씨는 네게 주는 것이 아니요. 너희 왕에게 전하라」하고 그 좌우명을 떼어 주니 함장이 그 글씨를 정중히 받아 가지고 갔다.
간재는 그의 큰 뜻을 다 펴보지도 못하고 1922년 7월 4일 계화도에서 눈을 감으니 향년 82세였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그의 3천여 제자와 그를 숭앙하던 수많은 조객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그해 9월에 익산시 삼기면(三箕面) 현동(玄洞)에 안장하였다.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구경꾼이 계화도에서부터 익산 삼기까지의 연도(沿道)를 메웠다. 주막과 인근 마을에는 숙식객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묶으면서 구경하는 등 큰 혼잡을 이루었다. 그의 성리학적 연구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한편 전주 덕진공원 연화문을 지나 공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큰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바로 간재 전우 선생의 유허비이다. 이 비는 맨 아래 거북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고 그 위에 비석이 있는데 여기에 < 간재전선생유허비 >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가운데 놓고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양각되어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76년 4월이다. 당시 전라북도 도지사인 황인성이 비문의 내용을 짓고 유도회전라북도본부 위원장 송성용이 글씨를 썼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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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28 [00:50]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