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도시의 멍에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7/03 [00:39]

양반도시의 멍에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7/03 [00:39]
일제 강점기 때 호남선이 부설됐다. 당시 일제는 원래 호남선 철로를 전주로 지나가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주에 사는 양반층의 반대로 결국 솜리 즉 이리로 지나가게 되었다. 당시 전주는 조선시대부터 전라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고도(古都)였다.
그리고 양반들의 영향력이 큰 곳이었다. 양반도시에 철마(鐵馬)가 들어서는 안 된다는 양반들의 부정적인 주장 때문에 호남선은 결국 전주를 비껴가고 말았다. 당시 호남선 철로가 전주를 통과하게 됐다면 전주 발전은 또 다른 모습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철로는 지역 발전에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지금도 전주지역에서는 < 쓸 데 없는 양반 행세 > 때문에 지역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고 비난한다. 이와 유사한 일은 지난 2007년에도 벌어졌다.
당시 전라선 복선전철화가 전주시 반대로 수개월째 겉돌면서 절름발이로 전락할 우려가 높았다. 인접한 익산시와 완주군은 행정 절차 이행 및 용지보상 등 구체적인 사업에 협조하는 반면 전주시는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익산에서 여수까지 153.4㎞에 이르는 단선 철로를 복선으로 확장하는 이 사업은 이미 완주 신리~여수(119㎞)까지는 완료된 상태였다. 건교부는 당시 총 사업비 7,270억원을 들여 나머지 익산~완주 신리까지 34.4㎞를 복선으로 확장, 여수엑스포가 개최되는 2011년 이전 2010년에는 사업을 완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건교부와 전주시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수개월째 평형선을 달리는 바람에 사업 착공은 물론 초기 단계인 용지보상 착수마저 늦어졌다. 건교부 철도시설공단 관계자는“분할측량을 완료하고 지장물 조사까지 마쳤지만 전주시가 수개월째 지적측량 성과도를 승인하지 않는 바람에 보상 착수를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보상 시기를 묻는 토지주 민원이 쇄도하고 있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 관계자는“송천동 구간에 대한 보완 대책 반영, 완충녹지 확보 등 합의점을 찾기 위해 건교부와 계속해서 대화를 하되 지적성과도 승인을 볼모로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도민들은“여수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익산~여수까지 전라선을 복선으로 확장하는 사업이 완료될 경우 운행 시간 단축에 따른 물류비용 절감은 물론 수십 년 동안 단선 철로를 이용해 온 지역민들의 철도 이용 불편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전주시의 전향적인 행정을 촉구했다.
마땅히 신속하게 진행해야 될 일을 놓고 쓸데없이 미적거리는 일은 여전히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일종의 양반 허세라는 비난이 지금도 여전하다.
물론 일각에서는 부정적으로 왜곡된 아전의 이미지를 가지고 전주를 아전의 도시로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다. 전주를 가리켜 아전 도시라고 종종 말한다. 전주성 안에 아전들이 많이 살았고, 전주 아전들의 세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래 전주의 병폐에 대해 아전 근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었다. 때문에 아전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의 힘이 막강하였다. 그러나 전주성 밖에는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살았다.
전주에서는 정승만 해도 이사철, 황헌, 정언신, 이상진 등 4명이 배출되었다. 대사간을 지낸 목산 이기경도 전주사람이다. 전주성 안의 아전들만을 보고 전주를 아전도시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원군이 조선의 3대 병폐 중의 하나로 전주 아전을 꼽았다.
전주 양반들이 권세 강한 아전 집 앞을 고개를 들고 다지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전주 아전의 세는 막강했다. 그러나 이는 19세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전주에는 전라감영이 있었기에 아전의 세가 강했다. 조선의 가치질서가 무너져 가고 세금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전주 아전의 병폐가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아전은 형편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감사와 수령 예하에서 행정실무를 책임졌던 사람들이다. 조선말 최고의 정통 성리학자로 전주 출신인 간재 전우도 아전 집안이다. 지금 내로라하는 인물들 중에도 아전의 후예들이 상당하다. 지금의 인식과 달리 조선시대 아전의 격은 낮지 않았다. 신분제하에서 양반사대부만 못했을 뿐이다.
전주는 오랫동안 양반의 도시로 인식되었다. 여유로움과 넉넉함, 풍류의 전통 등이 전주 양반도시가 갖고 있는 품격이다. 오늘날 한옥마을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근대 한옥 몇 백 채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양반의 도시, 전주의 역사와 정체성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한편 양반(兩班)이란 말은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 지체나 신분이 높거나 문벌이 좋은,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점잖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 남자를 높이거나 또는 홀대하는 말이다. 이전과 비교해 볼 때, 나은 형편이라는 말로도 사용된다.“하루 세끼 먹을 것 걱정하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 우리 살림살이야 양반이지”라고 말한다.
고려와 조선 시대, 무반(武班)과 문반(文班)을 아울러 이르던 말이다. 혹은‘동반(東班)’과‘서반(西班)’을 아울러 이르기도 했다.‘문반’과 ‘동반’은 모두‘문관(文官)의 가문’을 나타내던 말이다.‘무반’과‘서반’은 모두‘무관(武官)의 가문’이다.
관제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은 고려시대 경종대의 전시과(田柴科)에서부터 사용된다. 양반은 사대부(士大夫)·사족(士族)·사류(士類)·사림(士林)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문관 4품 이상을 대부(大夫), 문관 5품 이하를 사(士)라고 한 데서 나온 명칭이었다. 사대부를 사족이라고도 했다. 사족과 비슷한 용어로 사류와 사림이 있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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