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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허구인가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7/10 [00:42]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란 4세기~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지역에 통치기구를 세워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을 말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다.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혹은 줄여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고도 한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했다.
임나(任那)는 삼국사기 강수전의 '임나가량(任那加良)'이나 진경(眞鏡)대사 탑비에 쓰여진 '임나왕족(任那王族)인 흥무대왕 김유신'에서도 쓰고 있는 말로, 임나는 가야 연맹체의 중심이었던 가락국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비롯됐다. 고구려 장수왕이 414년 자신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과 영토 확장 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중국 지린성 지안현 통구 지역에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다. 일본은 바로 이 비석의 비문 가운데‘신묘년 기사’를 근거로 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는 것이다.
1883년 일본 육군 참모본보의 밀정인 포병 대위 사코가게아키(酒勾景信)는 옛 고구려 국내성 터였던 지리성 지안현에서 광개토대왕비의 묵본(墨本)을 입수한다. 사코가 가져온 묵본은 곧바로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 작업이 진행된다.
1884년에 2권의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이렇게 해서 150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일본으로 갖고 오면서 비문의 내용이 알려지자 일본 학자들은 몹시도 열광했다. 일본 실증사학의 시조로 유명한 시라토리구라키치(白鳥庫吉)는 "이 비석을 일본에 가지고 와서 박물관이나 공원에 세우자"며 광개토대왕릉비의 반출을 제안하기도 했다.
일본 군부는 실제로 비석을 일본으로 옮기려고 했다. 도대체 왜 일본 학자들은 남의 나라 비석에 이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이 비석에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증거가 될 만 한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서기 >에 따르면 4세기 신공황후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가야와 백제, 신라를 지배한다. 특히 가야(즉 '임나')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얘기다. 이를 근거로 19세기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이 난감한 것은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 자기네들의 역사책인 < 일본서기 >에만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당사자인 한국 측의 역사 기록인 < 삼국사기 >에는 '임나일본부'는 커녕 '임나'라는 말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중국 기록에도 없다.
그런데 바로 만주에서 발견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뜻밖에도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결정적 기록이 나온다. 바로 유명한 신묘년 기사이다. <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 < 일본서기 >의 신공황후 기사와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일본 학자들에게는 임나일본부를 증명하는 가장 유력한 자료였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1930년대 말 민족주의 사학자인 정인보였다. 그는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니만큼 신묘년 기사의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 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인 이진희는 일명 '석회 도포설'을 주장했다. 처음 비문을 연구하는 과정에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깊숙이 개입했었다는 점을 근거로 참모본부가 '탁본'을 바꿔치기 하고 심지어 광개토왕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변조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 뒤 1984년 중국인 학자 왕젠췬(王建群)가 비문에 대한 정밀 조사를 하여 잘못 읽은 부분들을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 그는 탁본은 손으로 하는 만큼 각 판본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군 참모본부의 석회도포 작전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임나는 이미 5∼6세기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반면 정작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 중엽 이후 만들어졌다. 허구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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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10 [00:42]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