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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의 설산 장덕수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7/17 [00:48]
해방 공간의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1894~1947)는 여전히 주목 받는 인물이다. 그는 황해남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결성(結城)이다. 형제는 이복형인 장덕주와 친형 장덕준과 친동생 장덕진 그리고 여동생 장덕희가 있다. 할아버지는 무명의 선비로 장초시(張初試)라 불렸으며 아버지는 평생 가난한 농부로 살았다.
형 장덕준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재령 보강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만주의 간도, 훈춘 등에 파견되어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동생 장덕진은 상해 임시정부의 행동대원이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인 카지노를 털다가 사살되었다.
설산은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그 뒤 진남포의 한 학교에서 장덕진 등과 하숙,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형 장덕준은 강사로 있었다. 그는 진남포 학교 기숙사에서 하숙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때 김구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황해도 해주 연희보통학교에 진학한다.
연희보통학교 졸업 후 황해남도 진남포 이사청 급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상관과의 충돌로 얼마 뒤 관료생활을 그만둔다. 그 뒤 노동과 막일에 종사하며 문관시험을 준비한다. 강의록으로 공부하던 그는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제임문관시험(制任文官試驗)에 합격하였다.
이어 조선총독부 판임관(判任官)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1912년 그는 판임관을 그만두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을 한다. 유학 중 그는 신익희, 김성수, 송진우를 만난다. 1915년 일본 전국 대학생 웅변대회에 참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열변을 토해 1등을 하기도 했다.
1920년『동아일보』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설산은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이듬해 컬럼비아(Columbia)대학에 입학하여 1936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송진우·김성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외교부장과 정치국장 등을 지냈다.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비상정치회의를 포함한 우파 세력의 정당과 주요 정치단체에 참여하여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활동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오후 6시 50분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의 제기동 집에 두 청년이 찾아왔다. 장덕수는 한민당 간부 몇 사람과 식사 중이었다. 장덕수가 마루로 나와 청년들과 몇 마디 나누고 방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경관 차림의 청년이 소총 두 발을 발사했다. 장덕수는 병원으로 옮기는 중 숨졌다. 송진우(1945년 12월 30일), 여운형(1947년 7월 19일)에 이어 해방공간에서 세 번째 정계 요인 암살이었다.
장덕수는 1912~1916년 일본 유학 중 김성수와 인연을 맺어 1920년 이후 계속‘김성수 맨’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김성수(1891~1955)는 일본 유학 중(1908~1914) 풍부한 재력으로 후일의‘김성수 맨’을 만든다. 와세다대학 2년 후배인 장덕수도 그중 하나였다.
장덕수는 학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빌딩 창문도 닦고, 음식점 접시도 닦았다. 미국 선교사들의 정원 손질과 유유 배달도 서슴지 않았다. 이 때 장덕수는‘운명의 사람’인촌을 만난다. 인촌은 은밀하게 설산의 학비를 달마다 보태주었다.
설산은 한민당 창당 때 외무부장을 맡았다. 당시 외무부에는 구미 유학을 마친 인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윤보선, 윤치영, 이활, 구자옥, 문장욱, 박용하, 최순주, 윤홍섭, 이상은 등 거의 모두가 해외 유학 출신이다. 설산은 고하 송진우를 하지 사령관이나 아놀드 군정장관과 긴밀히 연계시켜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또 이승만의 거처로 세칭‘돈암장’을 마련한다. 설산은 빈번하게 돈암장을 드나들었다. 경교장도 자주 찾았다. 김구에게 국내 정치정세의 동향이며 민족진영의 진로에 관하여 설명했다. 김구 역시 30여 년 전 재령 나무리벌 보강학교에서 장덕준-덕수 형제를 만났던 일을 회상했다.
한편 김구를 둘러싼 임정의 젊은 층 요인들은 설산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와 한민당, 한국독립당과 인촌, 그리고 백범과 설산 사이의 숙명적이었던 친화력은 날이 갈수록 멀어졌다. 설산의 인간적 비극을 예고한 셈이다. 김구를 장덕수의 암살 배후로 보는 이유다. 한편 해방 후 한민당 인사 중에서 친일 행적이 가장 뚜렷한 사람이 장덕수라는 비난도 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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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17 [00:48]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