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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운암비(虎隕岩碑)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7/19 [07:36]
호운암비(虎隕岩碑)는 전주시 한옥마을 옆에 위치한 이목대 일대를 가리키다. 호운암비(虎隕岩碑)의 호(虎)는 < 범 호 >, 운(隕)은 < 떨어질 운 >, 암(岩)은 < 바위 암 >, 비(碑)는 < 돌기둥 비 >이다. < 호랑이가 떨어진 바위 돌기둥 >이라는 의미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살았던 마을이다. '완산지(完山誌)'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이안사와 관련된 몇 가지 설화가 적혀있다. 그는 발산(鉢山) 남쪽 장군수(將軍樹)란 나무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진법(陣法) 놀이를 했다. 그 현장이 바로 이목대이다.
이안사는 아마도 집 앞에서 그 흔한 전쟁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전혀 없다. 다만 호운암(虎隕岩) 설화는 지금도 전해진다. 어느 날 이안사는 애들을 이끌고 병풍리 좁은목에 놀러 갔다가 비를 만났다. 그들은 급히 근처에 있는 바위굴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호랑이 1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났다. 호랑이는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로 으르렁거려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애들은 무서움에 질질 짜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안사가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호랑이가 한꺼번에 우리를 물지를 못할 것이다. 기껏 해봐야 한 사람 밖에는 물어가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 모두 웃옷을 벗어 던져서 호랑이가 무는 옷의 주인이 모두를 대신해서 호랑이한테 가도록 하자'
그 말을 들은 애들은 더욱 겁을 먹으며 말했다.
'우리 가운데 형이 제일 나이가 많으니 형부터 던져봐요~' '좋아. 내가 먼저 던질테니 호랑이가 내 옷을 받아 물면 내가 흔쾌히 호랑이한테 가겠다' 그러면서 웃옷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그러자 호랑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옷을 덥석 물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안사는 속으로 '아오 젠장~~'을 수없이 중얼거리며 약속대로 호랑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도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눈을 감으며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굴 밖으로 나가니 갑자기 천둥이 콰당치면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굴은 무너져 흔적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그는 살고 나머지 애들은 굴에 갇혀 죽은 것이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에게 왕기(王氣)가 깃들여져 산신령이 호랑이로 변해 그를 살려낸 것이라 여겼다.
이 설화는 태조 이후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생겨나거나 윤색된 설화일 뿐이다. 태조 왕건에게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있으니 제왕에게는 꼭 갖춰야 될 설화인 모양이다. 이목대는 오목대와 한덩어리로 묶여 전북 지방기념물 1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도로 위에 육교 같은 다리를 놓아 오목대와 이목대를 이어주고 있다. 오목대와 이목대(梨木臺)는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다리의 이름은 '오목교'로 '구름다리'라고도 불린다. 겉으로 보면 도로로 단절된 양쪽을 이어주는 육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다리에도 깊은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원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하나의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이 1931년 전라선(全羅線) 철도를 내면서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던 산줄기를 싹둑 끊어버렸다. 전라선이 개통된 이후, 이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남원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열차가 이곳만 지나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무임승차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혈맥(血脈)의 단절로 기차의 속도로 느려진다고 여긴 전주 유림들은 오목대와 이목대를 연결시켜야 된다고 민원을 넣었다. 결국 1960년경에 오목교를 설치했는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기차의 속도가 빨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전라선이 동쪽으로 이설되면서 오목교는 철거되고, 옛 전라선 자리에 기린로가 놓이면서 1987년 지금의 오목교를 만들었다. 오목교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승암산(僧巖山)의 산줄기가 단절되어 사고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오목교 구름다리를 건너면 이목대라 불리는 비각이 나그네를 맞는다. 이곳은 오목대와 마찬가지로 비석과 그것을 품에 안은 비각이 전부이다. 이목대 비석은 비각에 갇힌 듯 답답해 보인다. 오목대가 오동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이목대는 배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던 언덕이었다. 그래서 이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목대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의 유허(遺墟)로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 시절부터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전한다. 이안사는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고려를 등지고 원나라 땅인 함경도(咸鏡道)로 넘어가 새롭게 터를 일구었다.
태조는 그를 목조(穆祖)라 추존했다. 1900년 고종(高宗)은 그런 자랑스러운 조상, 태조를 기리고자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다. 비신(碑身)에는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다. 이는 고종의 친필이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한편 이안사(李安社.?∼1274)는 전주의 토박이이며 고려 장군 이양무(李陽茂)의 아들이다. 산성별감(山城別監)과 갈등을 빚고 삼척으로 이주했다. 산성 별감이 다시 삼척 안찰사로 임명되어 의주(宜州, 현재 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다.
1255년 알동천호소의 우두머리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1274년 죽으면서 아들 이행리가 관직을 이어받았다. 1392년 조선 태조에 의해 목왕(穆王)에 추봉되었다가 1411년 태종에 의해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에 재추봉되었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경남도 영광군에 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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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19 [07:36]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