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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서원(黃崗書院)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7/25 [17:05]

황강서원(黃崗書院)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3가 295-3번지 마전에 있는 서원이다. 황강서원(黃岡書院)은 본래 전주 곤지산(坤止山) 아래에 있었다. 고종 5년(1868)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렸던 것을, 광무 2년(1898)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세운 것이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됐다.

1603년(선조 3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문정(李文挺)·이백유(李伯由)·이경동(李瓊仝)·이목(李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문정을 주벽(主壁:사당의 으뜸이 되는 위패)으로 하여 이백유, 이경동, 유인홍, 강해우(姜海遇) 등을 배향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뒤에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복원과 동시에 김덕린(金德鄰)을 추가 배향하고, 그 뒤 강해우(姜海遇)를 추가 배향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강당과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인 외삼문, 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매년 3월 초정(初丁: 첫 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낸다. 제품(祭品)은 4변(籩)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대지 400여 평, 전답 6,000여 평, 임야 4정보가 있다.

이문정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정당문학(正堂文學)의 벼슬을 지냈고 한때 왕에게 배불정책(排佛政策)을 간하기도 하였다.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대(文學臺)라는 강당을 열고 후배를 양성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유허지가 현재의 황강서원이다. < 황강(黃崗) >은 이문정(李文挺)의 호이다.

이백유(李伯由, ?~1399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관리로 전주 출신이다. 1371년(공민왕 20)에 문과 동진사(同進士: 丙科에 해당) 제7위로 급제, 1389년(공양왕 1) 문하부태상시(門下府太常侍)에 이르렀다. 1392년 예조판서를 지내고, 그 해 7월 배극렴(裵克廉)·남은(南誾)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여 이성계(李成桂)의 집으로 찾아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공으로 개국공신에 오르고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鄭道傳) 일파로 지목되어 관작과 공신의 칭호를 삭탈당하고, 지방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죽은 뒤에 부분 복권되어 양후(良厚)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 왕조의 건국에 핵심세력이 된 신진사대부의 한 사람이었으나 권력 재편 과정에서 축출되었다.

이경동(李瓊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정당문학 이문정(李文挺)의 후손이며, 이몽(李蒙)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중유(李仲由)이고, 아버지는 안동판관 이달성(李達城)이며, 어머니는 이종미(李種彌)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예문관 겸 예문에 제수되었다.

1466년 예문관대교로서 발영시(拔英試)에 응시, 시부에서 최우수의 실력을 보여 세조의 신임을 얻고 선전관(宣傳官)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북정록(北征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예종 때는 예조정랑·승문원교리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1) 알성시에서 시부에 장원하였다. 1474년(성종 5)부터는 사헌부로 옮겨 장령·집의 등을 역임하면서 관기 확립과 민폐 시정 등에 노력하였다. 포도수령(捕盜守令)의 논상법(論賞法)을 성문화했고, 조세 부과에 있어 연분법(年分法)의 불합리성을 시정하였다.

1475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77년에는 왜인의 동태에 유의할 것을 경고하였다. 이어서 임사홍(任士洪)의 횡포를 견제했고, 내수사 장리(長利)로 인한 민폐를 시정하였다. 그 뒤 승정원으로 옮겨 성종의 신임을 받으며 국정을 보필하였다.

1479년 왕비 윤씨의 폐위에 반대했으나,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은 당시 현직 승지라고 해 직첩을 회수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다스리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호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83년『강목신증(綱目新增)』을 왕명으로 찬술했고, 1486년에는 대사헌으로서 유자광(柳子光)을 탄핵하였다.

한재(寒齋) 이목(李穆.1471-1498)은 짧게 굵게 산 곧은 선비로 유명하다. 조선조 중기 무렵, 사화가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던 시대에 살았다. 사화란 기골에 찬 선비들이 묵은 세력을 도려내고 새로운 정치와 기풍을 일으키려다가 떼죽음을 당한 것을 말한다.

이들은 개혁 정치를 이루어 보려고 기성세력에 맞섰다. 그야말로 젊은 기백으로 일신의 안녕을 돌보지 않고 싸운 것이다. 당시 기성세력은 높은 벼슬을 대대로 누리며 떵떵거리면서 살아오던 훈구파이다. 이목은 바로 이런 사류의 한 사람으로, 스물여덟 청년의 나이로 비명에 갔다.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어릴 적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선배격인 정여창, 김굉필(金宏弼), 김일손 등과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고 사물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그러나 이들의 사귐은 그의 생애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글 재능을 지니고 18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연산군 1년(1495)에 문과에 장원급제해 주요 관직을 거쳤으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모함을 받고 사형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중종반정 이후 모든 명예가 회복되어 뭇 선비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었다. 선비정신이 투철한 그는 짧고 굵게 산 표본이었다. 정간사는 이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정간(貞簡)은 이목의 시호인데 충남 공주에 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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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25 [17:05]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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