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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사고(全州史庫)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7/28 [07:06]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 전라감사 이광(李洸), 전주부윤 권수(權燧), 무사 김홍무(金弘武), 수복 한춘(韓春), 선비 손홍록(孫弘祿), 안의(安義) 등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당시 실록과 태조 어진(御眞)을 내장산의 은적암(隱寂庵,隱峰庵이라고도 함)으로 옮긴 후 다시 내장산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그 후 1593년(선조26년) 진주성이 함락되자 충남 아산으로 옮겼다. 전쟁이 불리해지자 태조 어진은 아산에 그대로 모셔두고 실록은 다시 황해도 해주(海州)로 옮겨졌다. 1595년(선조28년)에 강화도로 옮겼으며 그 다음해에는 태조 어진도 아산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1597년(선조30년) 9월 실록과 태조 어진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져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다. 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3부를 다시 출판하였다. 새로 인쇄한 실록 3부와 전주사고본 1부 그리고 교정 인쇄본 1부를 합하여 5부의 실록을 만들었다.

5부의 실록을 서울의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경북 봉화군의 태백산, 평북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하였다. 이후 춘추관의 소장본은 이괄의 난 때 불탔다. 1633년(인조11년) 명(明)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의 실록은 전북 무주군 적상산 사고에 이장되었다,

전주사고본인 마니산의 실록은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 때 크게 훼손 된 것을, 현종 때 이를 보수하여 숙종14년(1678년) 그 옆의 정족산성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 이후 철종실록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보관되어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전해왔다.

일제강점기 때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조선총독부에 옮겨지고, 적상산본은 구황실 장서각에 옮겨졌다. 오대산의 실록은 일본에 반출되어 동경제국대학에 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 버렸다.

적상산본은 1950년 6월25 전쟁 때 북한 측이 가져갔다. 현재 국내에는 정족산본(원 전주사고본)과 태백산본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 마저 불타 버렸다면 조선 전기의 방대한 역사는 과거 속으로 묻혀 버렸을 것이다.

전주사고(全州史庫)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조선 초기 4대 사고 가운데 하나다. 전주사고는 1439년(세종 21) 사헌부의 건의로 전주시에 있던 경기전 안에 설치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사고에 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하게 되어 현재에 이른다.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전주에 사고를 설치한 것은 이곳이 조선 왕실의 본관지이며, 이미 1410년(태종 10)에 태조의 어용(御容)이 경기전에 봉안되었기 때문이다.

또 실록각(實錄閣)이 처음부터 마련되지 않아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였다. 1445년(세종 27) 처음 전주에 실록들을 봉안할 때, 전주부(全州府)의 성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옮겼다. 1472년(성종 3) 세조·예종 양조의 실록이 만들어지자 성종은 양성지를 봉안사(奉安使)로 삼아 이를 전주사고에 봉안하게 하였다.

어느 시대나 당대의 일들을 후세에 전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특히 왕조의 역사를 담은 왕조실록은 중국이나 일본 다른 나라에서도 쓰여졌다. 조선왕조실록은 전왕(前王)의 죽음과 함께 실록청이 설치되어 총재관 이하의 관원이 사초(史草)를 주요 자료로 하여 전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은 왕의 곁에서 왕의 언행 일체를 매일매일 작성하였다.

사관은 사초를 절대 발설할 수 없으며, 작성 후 춘추관에 보관하여 함부로 열람할 수 없게 했다. 실록은 왕의 언행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 경제, 생활 모습 등 모든 분야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간혹 실록의 초안인 사초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선조·경종 때에는 기존 실록을 수정한 수정실록이 작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을 만큼 비밀 유지와 공정성이 보장되어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에 관한 기록이 궁금하여 사초를 보고자 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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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28 [07:06]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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