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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한반도의 비극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08/31 [16:16]

한반도는 이미 임진왜란 때부터 대륙과 해양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일본의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사이에 흥정이 오갔다. 8도중 한강을 중심으로 이북4도는 조선에 반환하고 이남 4도는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명(明)이 조선을 2-3등분으로 분할 통치하자는 안도 나왔다. 물론 불발로 끝났다.

1894년 2월 동학혁명 진압을 위해서 청군과 일군이 모두 한국에 파병된다. 결국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발발, 청군이 참패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화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이때도 한반도는 전리품으로서 강대국의 분할 흥정거리로 전락했다. 러․일 전쟁 때도 강대국 간 한반도 분할 비밀 흥정이 있었다.

1896년 6월 모스크바에서 있은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 때 일본의 야마모도 아리도모(山縣有朋)와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참석했다. 야마모도는 비밀리에 러시아의 로마노프 외상에게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서울이 포함된 남반부는 일본이 차지하고 북반부는 러시아가 갖게 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부동항에 야심을 가진 러시아는 전체 한반도의 단독 점령을 원했기 때문에 이 안을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민영환(閔泳煥)이 대관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이런 조선 말살 음모를 까맣게 몰랐다. 정보수집 기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7년 후인 1903년 러시아는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하고 이남은 일본이 배타적 지배권을 가지라고 제안했다. 이번에는 일본이 거절했다. 일본은 그동안 군비를 대폭 증강하고 현대화했다. 게다가 당시 최강국인 영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만(韓滿)국경을 중립지대로 삼아 러시아에게 만주를 넘겨주고 한반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갖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분할 흥정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러․일 사이 조선국 해체를 위한 음모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없었다.

해방 후 38도선 분할 점령 그리고 6․25전쟁 후 휴전협정과 남북분단도 우리의 의사는 모두 배제됐다. 오직 강대국 각축의 결과물이었다. 한반도 분단은 약소국에 대한 외세의 비밀 흥정과 정글 논리가 초래한 희생물이다.

남북 분단은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미국과 옛 소련이 상호 경쟁과 타협의 산물이다. 1945년 년 초부터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패전국 일본과 승전국 미국 및 연합군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한국만 모르고 있었다. 광복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던 날, 미군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반토막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반도에 직접 38선을 그은 장본인은 미국의 딘 러스크로 알려져 있다. 선을 그은 정확한 날짜는 1945년 8월 10일 자정쯤이다.

이에 앞서 1945년 8월중 미군전략기획단 회의에서는 일본 항복 후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이미 미군은 한반도를 분할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다만 어느 부분에서 분할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북위 39도선이 최적이라고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결정권자인 링컨 장군은 39도선을 거절하고 38도선으로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39도선으로 했을 경우 북쪽으로 상당 부분 올라간다. 평양 바로 밑이다. 그 부분은 한반도의 허리 부분에 해당되며 횡단으로 가장 짧다. 북쪽에서 침략이 있을 경우 방어하기에도 아주 적당하다.

만약 39도선으로 했다면 북한도 그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대신 뭔가 평화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미국과 소련은 그 당시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미국이 스스로 결정해 소련에 일방 통보했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은 미국과 같은 편에서 독일을 상대로 싸웠을 뿐이다. 일본과는 겨우 1주일간 적대관계에 있었다. 일본과 한반도에 관한 한 소련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38선 이남은 점령하지 말라는 미국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 들였던 것이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즉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 내의 일본군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미군은 그때 한반도에서 1천km 남쪽 멀리 오끼나와 섬에 있었다.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신속히 보낼 여유가 없었다.

반면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은 신속히 군대를 진입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인 1945년 8월 9일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8월 12일에는 청진-나진-웅기-경흥 등을 점령했다.

이런 속도라면 불과 2~3주 사이에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수 있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4일(워싱턴 시각) 밤늦게 서둘렀다. 한반도 중간의 북위 38도선까지만 소련군의 남하를 허용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소련에 통고했고 소련도 이를 받아 들였던 것이다.

미국은 분할선을 39도로 통고하거나 아예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입해선 안 된다고 강력 주장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소련은 한반도까지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의 분할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한반도 분할을 논의했다.

동북아에서 일본이 누렸던 기득권을 송두리째 미국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을 저지할 수 있는 소련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일본은 소련이 참전할 때까지 항복을 늦추고 있었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은 무려 100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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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8/31 [16:16]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