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분단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9/07 [15:16]

독일의 분단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9/07 [15:16]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침략했다. 그러나 독일은 결국 동쪽으로부터는 소련군, 서쪽으로부터는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히틀러까지 죽은 후 독일은 서부전선에서는 1945년 5월 7일, 동부전선에서는 같은 달 8일에 무조건 항복했다. 연합군의 결정으로 독일 국내에 흐르는 엘베의 동쪽은 소련군이, 서쪽은 미군이 공격하여 점령하게 되었다.

그 뒤 독일의 동부는 소련에, 서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에 의해 분할 점령된다. 소련군의 점령 지역에서는 1945년 9월부터 토지개혁이 시행되어 100헥타르 이상의 토지는 몰수된다.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진행하는 등 소련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것이다. 미국의 지배 지역에서는 3개의 주(州)가 설치된다.

엘베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베를린은 지리적으로 소련 점령 지역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수도라는 이유로 4개국 공동관리가 되었다. 베를린은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전후 베를린 시민에 의한 시의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소련을 지지하는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의 득표율이 20% 정도에 머문 데 반해 반(反)소련 입장의 사회민주당(사민당)은 49%를 득표했다. 그리고 사민당 출신의 시장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지시를 듣지 않는 시장의 존재를 소련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베를린 시장은 서부만의 시장으로 취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베를린뿐 아니라 전후 독일의 운명을 놓고 갈등이 커진다.

소련은 이미 독일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 그래서 독일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빼앗고자 했다. 독일의 전후 복구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소련의 점령 지역 공장에서는 대량의 기계 설비가 뜯겨 소련으로 보내졌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대 강국에 의한 독일 '군사적 점령'은 구체적인 점령기간을 정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분할된 각 점령지역이 장차 별개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의 전후 독일정책은 이미 전쟁 중에 수립되었다. 1944년 말, "독일통제기구협정"이 베를린에 설치되었다. 이 기구의 임무는 全독일에서 통일된 점령군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이 불가능할 경우 각 군사정부의 사령관은 자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해당 구역 내에서 독자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전승국의 독일정책에 관한 거부권이 도입된 셈이다. 全독일에서 사태 발전이 어느 일방 점령군의 목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점령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다. 이미 독일분단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의 동유럽으로 진출야욕과 1919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미국 간에 세력다툼이 일어났다. 미국은 소련의 배상요구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소련은 배상을 통해 소련의 경제력을 미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 했다. 영향력을 확실하게 중·동부 유럽에 뻗으려고 한 것이다. 미국으로선 이러한 소련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념적인 대립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독일이 항복한 후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연합국은 "독일을 경제적 통일체로 간주한다."라는 것에 동의했다. 독일을 "민주화하고, 민주주의 이념의 성공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문제는 숨겨진 그들의 서로 다른 생각들이다. 미국 등 서방측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및 서방식 민주주의 체제를 생각했다. 반면 소련은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은 독일이 항복하기도 전인 1945년 4월 30일에 발터 울브리히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인 공산주의자들을 모스크바로부터 독일로 파견했다. 소련식 행정체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소련은 미국과 영국을 분리시키기 위해 병합, 인민민주주의 지대, 완충지대를 구사했다. 완충지대가 실패로 돌아가자 동부 독일을 인민민주주의, 즉 소련식 체제로 개편하고자 했다. 소련은 1946년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강제로 만들어 낸다. 미국 군사정부 사령관 클레이는 1946년 5월 3일 배상물품 인도 거부로 맞대응했다.

1947년 11월 25일에서 12월 15일까지 열린 런던 외무장관 회담은 이제 냉전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서방식' 해결을 위해 서방점령지역의 독일인의 지지를 유도하게 되었다.

2차 대전 직후의 독일에서 서방 3개국의 지원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논쟁 역시 주로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과 서방화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논쟁은 1949년 1,2차 연방하원선거에서 후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독일은 분명하게 서유럽 통합에 적극 나서게 된다.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대소련 봉쇄를 시도하게 되며 소련에 대한 효과적인 전진기지로서 서독의 부흥과 서유럽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서유럽이 소련과 동구 국가들에 대항하여 제대로 방위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부활이 필요했다. 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이 서유럽 방위에 필수적이었다.

이에 미국은 본격적으로 독일의 부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서부 독일 지역만이라도 다시 부흥시켜 서독을 서유럽방위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프랑스가 여기에 반대하면서, 베스트팔렌 조약과 같은 해결책을 시도했지만, 프랑스로서는 미국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동부 독일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해지자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서방 3국의 점령지대를 하나로 통합했다. 1949년 9월 21일, 정식으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출범한다. 동독은 조금 뒤인 10월 7일에 독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독일은 전범국가라는 멍에를 쓴 채, 분단국가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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