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갈등 언제까지 가나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10/18 [18:14]

지역갈등 언제까지 가나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10/18 [18:14]

전라도와 경상도의 갈등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영호남 지역감정은 정치가들의 정략적 책략 등이 복잡하게 작용되면서 비롯됐다. 기존의 이익을 지키려는 영남 출신들과 개선을 요구하는 호남 출신들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립은 경제적 갈등에 의해 일어났다는 견해가 많다. 전통적으로 전라도 지역은 곡창지대로서 농업이 발전했다. 특히 쌀을 집중 생산하는 한반도의 밥줄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해방 직후 호남 대 영남 인구는 510만명 대 630만명으로 대략 1:1.2 정도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호남은 오히려 인구가 줄어서 약 500만이었다. 영남은 약 1300만으로 영남 인구가 호남 인구의 두 배를 넘는다. 지금도 여전히 영호남간의 차이를 좁히기가 어렵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제3공화국 시대(1960년대 박정희 정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호남지역은 공업화를 위한 산업기지의 선정에서 제외되었다. 현저하게 불리한 취급을 받았다. 결국 지역 간의 격차를 초래했다.

대규모의 공장 시설과 기업들은 영남지역에 들어섰다. 주요 공단과 산업단지들은 영남지역 항구 근처에 세워졌다. 부산항이나 울산항 등 영남의 항구는 동남아시아, 일본, 미국 등을 잇는 세계적 항구로 성장했다.

물론 호남은 영남보다 중국에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한창 성장하던 시대는 중국과 교류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대중국 교역도 굳이 인천이 있는데 호남의 항만을 억지로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60-70년대 당시 한국의 주된 수출 라인은 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라인이다. 일본과 가깝고 미국으로 나가기 쉽고 들어오기도 편한 영남지역에 중화학 공업이 집중됐다. 영남지역은 일자리 수요가 증가하면서 2차 산업 종사자들이 급증했다.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고 1960년대 이후 지역 소득이 전국의 평균소득을 웃돌았다. 반면 호남지역은 정반대였다.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자연스럽게 호남지역에서는 인구공동화 현상이 발생했다. 인구 유출을 막을 만한 경제적 기반이 전무했다. 지역 경제는 활기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에 대한 특수한 이미지나 인식은 이 시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시로 유입된 사람들은 대부분 학력이나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대부분 하층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억척스러움'을 보여야만 했다.

'향우회'와 같이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들끼리 뭉쳐 스스로를 도와야만 했다. 이런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전라도 출신을 표현할 때 '독종', '강한 생활력', '건달패'와 같은 이미지들은 바로 이 시기에 생겨났다.

영남의 지역성에 호소하는 전략은 1963년도 대선부터 나왔다. 1963년 9월 10일 대구고보 수성 천변 유세에서 찬조 연설로 나온 이효상이 문제였다. 그는 '이 고장은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하나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 임금님으로 모시자"라고 선동했다.

지역감정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특히 박정희는 지역 간 격차를 정권 재창출에 이용했다. 재집권에 있어서 김대중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은 큰 위협이 되었다. 결국 그는 정치적 쟁점을 정권의 정당성, 민주화가 아닌 지역 간의 대결 구도로 몰아갔다.

결과는 1971년 대선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영남에서 박정희는 260만 표, 김대중은 100만 표를 획득했다. 호남에서 박정희는 80만 표, 김대중은 140 만 표를 얻었다. 영남에서는 박정희가 2.6 대 1의 비율로 우세했다. 반면 호남에서는 1.7 대 1의 비율로 김대중이 우세했다. 득표차는 94만 표였다.

박정희가 경북지역에서만 92만 표를 더 얻었다는 것은 지역감정이 영남지역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던 결과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도 호남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90% 이상 투표했다. 반면 영남권에서는 10% 정도의 표를 얻었다. 이회창은 경상도 출신이 아닌 충청도 출신이다. 민정계의 영향이 남아있던 한나라당에 힘입어 530만 표 이상의 지지를 영남에서 확보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동서간의 지역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영호남 지역 갈등의 시작을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로 꼽는 견해가 많다. 실제로 훈요십조의 내용 중에는 차령과 금강 이남의 백성에게는 벼슬을 내리지 말라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왕건 주변에는 호남 출신이 많았다. 첫 왕비는 나주 출신이다. 맏아들인 혜종의 외척도 호남 출신이다. 높은 벼슬을 한 이들 중에도 호남 출신이 많다. 훈요십조가 훗날 위조되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충주 호족 출신인 정종과 광종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집권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혜종을 폄하해야 했기 때문이다. 훈요십조에 해당 대목을 새로 삽입하여 쿠데타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왕건의 '훈요십조'는 후백제 잔여세력에 대한 견제였을 뿐이다.

호남지역 백성들에 대한 지역 차별이나 폄하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도 주목할 만한 동서 간의 갈등 국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시대 차별을 받았던 지역은 관서 지방이다. 조선 초부터 관서 출신들은 고려의 유민으로 구분되어 중앙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도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다. '홍경래의 난' 같이 지역 차별에 반발하여 봉기한 민란이 자주 발생했던 지역이 바로 관서 지방이었다. 호남과 영남의 대립은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편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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