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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에서 장보고의 꿈을 키워라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7/11/14 [14:38]





새만금 사업이 진행되면서 선조들의 서해안 개척정신을 승계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선조들은 황해 즉 서해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해양 활동을 전개했다. 해상권을 장악했던 장보고 등 선조들은 단순히 지정학적인 이점만 활용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앞으로 서해안 시대의 주역은 새만금 사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역사의 흐름은 새만금을 통하여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잊고 지내왔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김제 벽골제를 '장보고 유적장' 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제(옛 벽골군)는 장보고가 피살된 10년 후인 851년 완도지역 저항세력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지역이다. 장보고와 관련된 유적지 중 전남 완도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다. 장보고가 역사에 미친 영향과 장보고 사후 그 세력의 활동 상황 등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은 이미 사학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계기로 김제 벽골제와 장보고를 연계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 개발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김제는 장보고 사후 청해진 유민들이 벽골제를 중심으로 대거 흘러든 곳이다.

그 활동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역사적 현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제시는 이미 몇 해 전에 청해진 유민의 벽골군 유적지 관련 지표조사 및 개발계획 용역을 발주했다. 이어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벽제초등학교 부지 내에 기념비를 건립키로 했었다.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비 건립과 함께 주변 공원화 사업을 벌였다. 전라남도 완도를 중심으로 한 청해진 유민들은 해상왕 장보고가 죽은 뒤 벽골군(김제의 옛 지명)에 강제 이주 당한 것으로 각종 사료에 기술돼 있다. 이를 토대로 김제시와 완도군은 장보고 재조명 사업을 벌이면서 합동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김제시가 청해진 유민 벽골군 이주 기념비를 세우기로 방침을 정했다. 시민들은 보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청해진 유민 이주지에 대한 이미지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사학계를 중심으로 장보고가 단순한 장군이 아닌 동북아 해상무역의 개척자임이 알려졌다.

벽골제를 찾는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그의 업적과 정신을 알리는 교육의 장으로 이를 활용해야 한다. 청해진 유민의 벽골군 이주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단순히 기념비 하나만 세울게 아니다. 완도군과 보다 긴밀하게 협조해 벽골제를 장보고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장보고처럼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인물은 매우 드물다. 평범한 신분에서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성장했고 이후 시대를 앞서는 혜안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어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신라로 돌아와 강력한 해상세력인 청해진을 구축하고 왕도 자신의 손으로 세울 만큼 권력을 장악했다.

더구나 장보고의 시선은 신라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나라 산동의 법화원, 일본 천태종의 법승 엔닌을 아우르는 이른바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원대한 리더십의 전형이 바로 장보고이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중일 삼각무역은 물론 거대한 선단을 운영해 당대 최고의 해상왕 겸 무역왕이 되었다.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아들과 부하 이창진에 의해 청해진은 유지되었으나 그 세는 점점 약해졌다. 결국 851년 문성왕은 청해진을 해체하고 그곳의 백성들은 모두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장보고의 흔적을 지운 것이다.

장보고는 서기 787년 신라 남쪽에서 태어났다. 신라 귀족들이 그를‘해도인 海島인’이라 지칭한 것으로 보아 남해의 섬 출신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장보고 집안이 농사를 지으며 어부 노릇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미천한 평민 출신’이라는 것으로 보아 가난하고 이름 없는 가문 출신으로 보인다.

더구나 애초의 이름이 궁복, 궁파로 성이 없었다. 대신 이름 그대로 활을 잘 쏘고, 수영도 잘 했으며 창술 등 무술 솜씨가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 씨인‘장(張)’씨 역시 장보고가 중국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을 섬에서 보낸 장보고는 당나라로 떠날 결심을 한다. 철저한 골품제 신분 사회인 신라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출중한 무예 솜씨를 갖고 있어도 관직에 오르거나 요직에 발탁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는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

상단을 이끌며 무역업을 하던 장보고는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인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설립하고 대폭적인 지원을 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나가는 신라인들을 거두고 이들을 자유민으로 만들거나 농지를 주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당시 당나라 산동성 등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라인 거점을 마련했다. 828년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왔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적극 활용했다. 당나라 군대에서 익힌 전략을 바탕으로 장보고의 해군은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 자리 잡은 법화원에도 지속적인 지원을 해 그곳을 신라인은 물론 일본과 당나라 승려들의 연수원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10여 년간을 머물며 공부를 한 일본의 승려 엔닌이 훗날 일본 천태종을 중흥시켰다. 지금도 교토의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는 적산대명신이라는 신라인들이 모시던 신을 상징하는 상이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장보고에 대해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한 엔닌의 뜻이라고 한다.

새만금 사업으로 전북이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 해상왕 장보고의 해양개척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해양 부국 건설의 정신적 기반을 정립해야 한다. 먼저 장보고 재조명·평가사업 기본 계획을 확정해야 할 것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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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14 [14:38]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