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중국 제대로 보자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12/18 [00:42]

이제 중국 제대로 보자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12/18 [00:42]


 요즘 한중관계가 편치 않다. 이는 사드 갈등을 통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지금 중국에서 한국은 극심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중국 혐오도 만만치 않다. 기성세대일수록, 친미국적일수록 더욱 중국을 혐오한다. 보수는 냉전적 시각에서 중국을 혐오한다. 진보는 민주화의 관점에서 중국을 혐오한다.
 문제는 중국을 아무리 혐오해도 중국은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우리가 이사를 갈 수도 없는 이웃나라다. 중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대로, 이웃집은 바꿀 수 있어도 이웃 나라는 바꿀 수 없다. 지난 5천 년 동안 우리와 중국은 때로는 전쟁도 했다. 때로는 도움도 주고받으면서 살아왔다. 적이기도 했고 친구이기도 한 셈이다.
 앞으로도 그런 관계는 반복될 것이다. 지금 중국은 중국 역사에서 드물게 번영기를 누리고 있다. 먼저 오늘의 중국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중국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중국은 전통시대의 중국이나 과거 냉전시대의 중국인 경우가 많다.
 삼국지나 공자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중국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중국과 싸울수록, 중국이 위협적일수록 중국을 더 잘 알아야 한다. 중국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근대 이후 우리가 중국을 보는 눈은 일본과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이나 일본의 이익이 우리와 같을 수만은 없다. 21세기 중국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활용 전략이 절실하다. 우리에게는 어두웠던 양국 관계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선입견과 부정적 이미지가 많다. 중국을 보다‘제대로’인지하고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을‘짱골라’라고 부르면서 덮어놓고 무시할 때가 있었다. 중국이 아편전쟁 이후 쇠락하고 근대화에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오히려 한국보다 뒤떨어진 나라로 전락했다. 일본은 청일전쟁(1884년)에서 승리한 이후 중국을 멸시하는 풍조가 심했다.
 중국인을 청국인(淸國人)이라고 부르지 않고 경멸하는 뜻으로 시나징(支那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은 중국을 밀어내고 동아시아 맹주가 되려고 했다. 중국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중국인이 게으르고, 더럽고, 느리고, 시끄럽다는 등의 표현을 동원했다.
 

 민족성을 비난하면서 미개한 중국을 개화시키고, 근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문명화된 일본이 중국을 접수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중국을 나쁜 이미지로 만든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 강점 상태에 있던 한국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김동인의 소설《감자》를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에 나온 소설에서 중국인은 대개 돈만 밝히는 인색한 인간이자 파렴치한 호색한으로 등장한다.   그 당시 중국을 보는 조선 사람들의 시각은 대부분 그랬다. 우리가 중국 사람들을 욕할 때 짱꼴라나 짱께라고 한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우리를 욕할 때‘고려 몽둥이’란 뜻으로‘가오리방쯔(高麗棒子)’라고 한다. 이 욕도 우리가 중국인을 비하하고, 여기에 중국인이 맞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겼다.
 일본이 지배하던 만주 지역에서 한국인들은 일본 지주를 대신하여 중국 소작인들을 관리하거나 일본 지배의 중간 관리자 역할을 했다. 이 때 몽둥이를 들고 중국인을 다루었다. 그래서 한국인을‘고려 몽둥이’라 부르게 된다.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 인식 속에서는 문명개화한 선진국 일본이 가장 위에 있었다.
 개화의 길을 가고 있는 조선이 그 다음에 위치했다. 미개한 중국이 가장 밑에 위치한 것이다. 근대 이후부터 항상 우리가 중국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을 우리보다 못한 나라라고 멸시한 것이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고 한국전쟁에서 적국으로 싸우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중국에 대한 멸시감은 적대감으로 이어진다.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은 공산 불량국가였다. 북한과 손잡고 우리를 위협하는 적국이었다. 우리는 중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채‘중공(中共)’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인정하는 유일한 중국은 자유중국, 즉 타이완에 있는 중화민국이었다.
 동아시아에 냉전체제가 형성되고, 우리가 미국 중심의 축에 편입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강해진다. 우리의 중국관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셈이다. 근대 시기에 우리의 중국관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면 현대 이후에는 미국의 영향을 받는다.
 미국의 눈에 따라서, 미국을 기준으로 중국을 보게 된 셈이다. 자유세계를 위협하는 공산 국가라는 차원에서 중국을 보았다. 1992년 한중수교로 우리의 중국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수교 이전에는 일본과 미국을 통해 중국을 접했다.
 그러나 한국이 직접 중국을 상대할 수 있게 됐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한중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 한때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이 풍부한 중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거대한 중국의 내수시장을 기회라고 생각한다. 한반도 평화 차원에서도 중국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질서를 변화시키는 차원에서 중국을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중심의 질서가 초래하고 있는 문제점을 중국이 개선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미국 패권을 넘어선 대안적 세계 질서를 만드는 데 중국이 기여해주길 바란다.
 반 미국 패권주의 혹은 미국 비판 차원에서 중국이 견제와 대안적 역할을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다. 이제 중국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중국은 북한이 개방화의 길로 가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원치 않는다.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하기를 많이 바라고 있다. 그리고 남북한 양쪽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한국이 통일되면 독자 노선을 걸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런 상황을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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