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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3,000궁녀 설은 허구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2/02 [09:04]


역사의 현장을 찾아 다리품 파는 작업이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했는가에 따라 역사란 진가의 척도를 알 수가 있다. 백제폐망(AD663년) 올해로 1355년이란 연수는 백제부흥운동의 3년을 더한 것으로 주류성, 백강전투에 대한 연구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한해로 1월1일 개암사 울금바위 주류성에 올라 해맞이를 시작으로 다짐을 해본다. 제일 먼저 일본인들이 부른 백제라는 이름은 무엇이며, 의자왕은 3000궁녀를 거느린 패주였을까? 에 대한 의문점부터 풀어보기로 하자. 백제사에 관한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일본 사람들은 백제(百濟)라고 쓰고 구다라(くだら)라고 읽고 있다. 일본인은 고유지명을 붙인 그 사람의 마음대로 소리 내어 읽는다고 하지만 백제(百濟)와 ‘구다라’는 동떨어진 음운(音韻)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백제가 없다)’라는 뜻으로 쓰는 것은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지난해만도 부여를 두 번을 찾았다. 그런데 ‘구다라(くだら)’에 대한 의문을 백마강나루터에서 그 해답을 찾아 여간 기뻤다. 백제는 왜에 담로를 둔 상국으로 교역이 빈번하게 이뤄졌는데 사비성의 제1부두의 옛 지명이 지금의 ‘구드레’나루터다. 아마도 수많은 왜의 상인들이 이곳을 들고 나면서 구드레를 구다라라 발음 한 것으로 인식되며, 그 마을 이름이 지금도 ‘구드레’라고 부르고 있다. 구드레 나루터에서 황포돛대의 배를 타고서 잔잔한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왕포암(王浦巖) 암벽에 백화가 떨어진 낙화암(落花巖)이라고 조선조 서인의 거두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새긴 필적이 남아있다. 고란사(皐蘭寺)와 백화정과 3000 궁녀의 전설적인 현장을 돌아보았지만 이곳 어디에도 3000명의 여인이 통곡하며 줄을 지어 뛰어내릴 만 한 공간은 없다. 고란사 뒷벽에는 궁녀가 치마를 무릅쓰고서 백마강에 떨어지는 애잔한 그림 한 폭이 그려져 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匹夫)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匹夫有責)라는 중국 명말(明末)의 사상가 고염무(顧炎武,1613년~1682년)의 말도 수궁은 가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지배 계급이 흥망의 일차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이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고려의 공양왕(恭讓王)과 조선의 고종,순종황제(高宗-純宗皇帝) 모두가 책임이 무거운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 같은 역사의 한 단면만 보아 정도를 넘는 문책은 결코 선조에 대한 예가 아니다. 그 중에도 의자왕의 경우 3000 궁녀 얘기만 해도 역사적으로 입증이 안 된다.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한때는 성하다가 쇠하는 흥망성쇠는 있기 마련이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총 호구 수는 76만호였으며, 인구는 620만 명 정도였다는 문헌상의 기록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백제의 옛 땅이라고 알고 있는 전라도와 충남 땅의 현재 총 호구 수가 250만 호에 직할시 인구(3백만)를 더한 8백만 명의 밀집 인구비율에 비해 1400년 전 백제 인구가 지금보다 많았다는 점에 의아할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역사적 논쟁이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백제의 영토가 한반도이남 서부만이 아니라 왜를 포함한 보다 방대한 해상 강국이었음을 여러 문헌에서도 알 수가 있다. 백제가 멸망하던 날,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의 기록에 의하면, 그 날 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에 올라가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라고 쓰고 있다.(三國遺事 권1 태종 춘추공 조) 고려시대의 문신 이색(李穡)의 본향 충남 한산이 본관인 그의 아버지 이곡(李穀·1298∼1351)이 부여를 돌아보고 ‘하루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척의 푸른 바위가 낙화암이더라(一日金城如解瓦 千尺翠巖名落花)’라는 시를 읊었고,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존오(李存吾·1341∼1371)역시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는 시를 보면 고려 때 이미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 조선조에 들어와서 백성들의 과음(過飮)을 보고서 세종대왕은“신라가 망한 것은 포석정(鮑石亭)의 술잔치 때문이었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도 술 때문이었으니 백성들은 과음을 삼가라”고 한 세종실록(世宗實錄15년10.28丁丑 조)기록으로 보아 이 때 이미 낙화암이라는 말이 세상에 떠돌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동국여지승람’(券18忠淸道부여 편)에 이곳의 지명이 공식적으로 낙화암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패망할 당시 사비성(부여)에는 총 1만 가구로 인구는 4만5000명 정도였으며, 2500명의 군대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구 4만5000명에 군대는 2500명이었던 도성에서 3000명의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식량 생산력이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사실상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지금 부여군의 인구가 7만5000명인데 현재의 도시 능력으로도 궁녀 3000명을 거느린다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다. 어떠한 사료에도 3000의 궁녀가 낙화암에서 빠져죽었다는 기록도 없고 입증되지도 않는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기록(東史綱目권2 庚申 秋 7월 조)에 따르면 여러 비빈들(諸姬)이 자결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3000궁녀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사학자 이홍직(李弘稙)교수의 국사대사전(1962)에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이홍직이 3000 궁녀 설을 첫 주장하는 자도 아니다. 다만 참고 문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들고 있으나 그 책에도 3000 궁녀 설은 없으며 아마도 구전을 정리한 것이리라. 의자왕은 무왕(武王)의 아들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해 해동증자(海東曾子)란 칭호를 들었다. 집권 초기에는 신라의 40여개 성을 빼앗을 정도로 그 명성을 날렸으며,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과 같은 3충신과 함께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은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이니 당나라를 끌어 들인데 대해 대비하지 않은 것이 의자왕의 큰 실책이었다. 결국 재위 20년만인 서기 660년 전쟁에서 패한 그는 왕자13명과 귀족 등 13000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 망국의 제후들이 묻히는 북망산(北芒山)에 한줌의 흙으로 무주고혼이 되었다. 의자왕이 3000궁녀를 거느린 황음무도(荒淫無道)한 패자로 역사왜곡을 하여 그를 인신공격한 것은 의자왕뿐만 아니라, 아직도 일제식민사관의 잔재 그늘에서 구천을 떠돌 억울한 선조에 대한 해원을 풀어 줄 책무는 우리 후손들의 몫이라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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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2/02 [09:04]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