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중국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북-중 관계 변화에 주목하라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3/04 [18:11]

북-중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주시해야 할 때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 과정에서 중국은 대북 제재‘찬성’에 손을 들었다. 북한의 핵실험에 이어진 유엔안보리결의 1718호 채택에도 중국은 찬성했다. 북-중 관계에도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1948년 9월 9일 수립된 북한 정권의 강력한‘동맹’은 소련이었다. 북한 정권은 사실상 스탈린이 세웠다. 김일성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스탈린은 광복 직후부터 북한에 당과 주요 기관에 소련 고문을 보냈다.

소련군을 철수하면서 당과 주요 국가 기관에 소련 출신 조선인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김일성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군권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강화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일으킨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다.

만주까지 쫓겨 간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최고의 정예병인 팔로군 출신들을 전선에 투입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도움)를 선언하고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전선에 내보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12 관문’을 만들어놓겠다고 약속했다. 압록강을 내줘야 할 상황이 되면 그 다음 만주, 그 다음에는 베이징, 마지막에는 연안까지 12개 전선을 구축해 끝까지 같이 싸우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전사하던 날 덩샤오핑이 이 소식을 간단히 메모하여 회의 중이던 마오쩌둥에게 전했다.

메모를 본 마오쩌둥이 메모지를 옆으로 밀어놓고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회의를 진행했다. 중국 지원군은 1945년 급조되어 북한에 투입된 소련 점령군과는 근본이 달랐다. 당시 북한에 투입된 소련군은 극동군 중에서도 범죄자 출신이 많아 강간, 약탈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중국 지원군은 달랐다. 북한 주민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마음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김일성은 정전(停戰) 후 중국 지원군이 철수할 때 환송단에 첫딸인 김경희를 보내기도 했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1953년 비밀 군사협정을 통해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중국은 북한의 대남 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북한에 대한 정치·군사·경제 분야의 지원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1971년 8월 무상 군사원조 협약 등을 체결했다. 북한의 통일노선을 지지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라고 했다. 차츰 김일성은 소련과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중·소 양다리 외교를 시작했다. 김일성은 1955년 12월‘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우리식대로 해나가자는 주장이다.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내부의 중요한 파벌이던 소련파, 연안파(중국파)를 모두 제거하고 1958년 말 독재체계를 거의 수립했다. 이후 1960년대를 거치며 북한의 외교노선은 중국과 소련 어디에도 결정적으로 치우치지 않는‘주체외교’를 편다.

중국과 북한은 1960년대를 거치며 각각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이 잇따라 실패하면서 무려 3000만 명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1966년 촉발된 문화대혁명은 전국을 광기(狂氣)의 계급투쟁으로 몰아넣었다.

김일성은 1966년 8월 로동신문 논설을 통해 소련을‘수정주의’로, 중국을‘교조주의’로 동시에 비판했다. 군사력 증강을 줄이고 인민경제를 중시하자는 갑산파도 모조리 숙청했다. 동생인 김영주와 아들 김정일 간 권력투쟁의 산물인‘유일 사상체계’도 이때 등장한다.

그 뒤 1974년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가 됐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어 1975년 4월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했다. 이어 1978년 화궈펑과 덩샤오핑이 각각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1978년 말 중국의 개혁 실용주의 노선과 개방 정책에 따라 중국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문화혁명의 극심한 폐해를 스스로 극복하고 덩샤오핑의 깃발 아래 1979년부터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북한은 1974년 이후 김정일 세습 후계 체제가 되면서 더욱 폐쇄국가로 치닫는다. 양국 사이는 차츰 멀어졌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의 발언에서 유래했다. 1980년대 초 김정일은“흑묘백묘론은 명백한 기회주의이며 수정주의다. 사회주의 근본 원칙을 버리고 개판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도 있으니 공식적으로‘까지’(비판하지) 말고 외교관들에게 주의를 주라”고 지시했다.

1988년 소련과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은 북한 정권에 위협적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중국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남북한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나갈수록 북-중 관계는 퇴보했다. 특히 1992년의 한-중 수교는 북-중 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 뒤 북한에 본격적인 식량난이 닥쳤다. 1998년까지 무려 3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1998년 대포동 1호를 발사하면서 한반도 주변에 군사적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 이후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과 중국의 경제 지원으로 연명해왔다. 2002년 10월 2차 핵 위기가 촉발된 후에는 협상을 위장한 6자회담을 이어오다 끝내 핵실험을 강행했다.

중국도 북한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북-중 쌍방 간 이해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 남한의 존재다. 한·미 대(對) 북·중의 관계에서 북한 지역이 힘의 완충지대로서 쓸모가 있다. 중국이 김정일 정권을 해치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정복규 기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8/03/04 [18:11]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