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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로(柳一韓路)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3/22 [17:34]



유한양행 제약회사를 설립하여 국가와 국민에게 기여한 양심적인 기업인상으로 2004년 4월 23일 국내에서는 최초로 기업인의 이름을 따 경인고속국도의 부천 구간 6㎞를 ‘유일한로(柳一韓路)’라는 선포식을 가졌다. 부천시는 유일한(1895-1971)이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지금의 심곡동에 제약 공장을 지어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1999년 ‘부천시를 빛낸 공덕 인물’로 선정, 사후 28년 만에 부천중앙공원에 유일한 동상을 세워 업적을 기렸다.

기업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린 유일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상(紳商-민족상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유일한의 부친 유기연(柳基淵)은 경북 예천생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스물여섯에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행상으로 어렵게 돈을 모아 마침내 평양에 점포를 내어 처음에는 농산물이나 건어물을 팔다가 점차 서구의 수입품 잡화상으로 독일산 미싱(Singer)등 고급물품을 취급하는 도매상으로 성장하였다. 평양은 서양 문물로 개화가 일찍 되어 도산 안창호(安昌浩),조만식(曺晩植-물산장려운동) 등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민중 계몽사상이 활발하게 퍼지고 있었다. 유기연은 캐나다 의료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을 만나 성경 이야기를 듣다가 그의 인격과 봉사 활동에 감동을 받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아내의 이름을 김확실에서 김기복(金基福)으로 바꾸게 된다. 유일한은 1904년 9세 어린 나이에 대한제국 순회공사 박장현을 따라 미국에 단신으로 유학을 떠날 만큼의 기백이 남달랐다. 유일한에게 미국은 새로운 학문과 자본주의 정신을 배우게 해준 제2의 고향이었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훈을 평생을 두고 실천하였다.

유일한(본명一馨)은 한자로 일한(一韓)으로 쓸 경우 하나의 대한제국이라는 뜻과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에서 개명하기로 했다 한다. 유일한은 1916년 가을 미시건주 앤아버(Ann Arbor)에 있는 미시간주립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 유학생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에 젖어 장사를 천시한 탓에 상(商)과 보다는 정치학이나 법학을 선호하였다. 유일한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장사 일을 지켜보며 가난한 조국에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상과 계통의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훗날 배필이 된 한 살 아래인 중국인 호미리는 미시간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동북부 코넬대학교의 의학부를 졸업한 미국 최초의 동양인 여성 의사가 되었다. 그 후 1925년 호미리와 결혼하고 이듬해인 1926년 12월 10일 귀국하여 서울 종로2가 45번지 덕원빌딩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유한양행’을 설립을 한다. 유일한은 일제 식민지가 된 조국의 비참한 현실과 굶주린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기업을 설립한 것이다. 기업 중에서도 제약업을 택한 것은 “건강한 국민만이 장차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나라도 찾을 수도 있다.”는 애국사상이 깃들어 있었다. 1928년에는 미국 사람들에게 빼앗긴 조국을 소개하는 조선의 관습과 풍습인 명절·성묘·놀이·역사·학교 등으로 나누어 서술한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기업윤리와 복지차원에서 종업원에게 액면가의 10퍼센트 정도로 주식을 골고루 나누어 준 것은 우리나라 기업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강제모금을 할 때 정경유착은 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한 것에, 세무조사를 받았으나 세금을 더 많이 낸 사실에 감동을 받은 군사정부는 동탑산업훈장과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牡丹章)을 각각 수여했다.

유한공업전문학교는 유일한이 생전에 확보해 두었던 부천시 역곡동 부지에 세웠는데, 1979년 유한공업전문대학에서 1991년 유한전문대학으로, 1998년 유한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에 의한 근검과 정직을 앞세워 사업을 일으키고 교육 사업에 온 힘을 쏟았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세브란스병원에서 평소 그가 즐겨 부르던 찬송가 ‘다시 만날 때’를 조객들과 자녀들이 조용히 부르는 가운 데 7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 의 유언장에는 그가 소유했던 유한양행 주식 14만 9백 41주(시가 2억 2천 5백만 원)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하였고 유일한의 딸 유재라 에게는 오류동 유한중·고등학교와 그의 묘소가 있는 5천 평의 대지를 상속하여 ‘유한동산’으로 가꾸게 했으며, 손녀 유일링(7세)에게는 대학졸업까지의 학자금으로 쓰도록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 1만 달러 정도를 남겼을 뿐이다. 미국의 장남 유일선 에게는 ‘너는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요즘의 대기업은 엉터리 세습과 탈세와 정경유착으로 기업 윤리를 망친 것과는 달리 유한양행은 많은 기업인의 사표가 되고 있다. 군사정부는 1971년에 국민훈장 무궁화훈장과 1995년에는 자주독립정신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앞으로 제2, 제3의 유일한 로(路)가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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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22 [17:34]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