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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과 하루 데이트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4/04 [09:36]


  오늘 하루 데이트 상대는 서동, 데이트코스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받은 익산 백제역사 유적지구다. 늘상 다니던 길을 오늘은 특별한 감정으로 오롯이 그를 생각하며, 그의 길을 걸어가며, 그만을 관조하려 설렘을 안고 길을 나섰다.
 먼저 그의 생가(生家)터를 찾았다. 길옆 생가터 안내판과 그에 관한 여러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구나!' 며칠 전, 노인들을 봉고차에 모시고  ‘익산천만송이 국화꽃 축제’를 구경시켜 드렸다. 이왕 나들이를 한 김에 미륵사지, 왕궁리전시관을 안내한답시고 이 앞을 스쳐지나갔는데, 처음부터 내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이곳이 서동의 생가터임을 몰랐으니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삼국사기]에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 명백하게 명시되어 있고, [삼국유사]에 과부가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해 낳은 아이라는 서동의 설화가,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연못가(마룡지) 에 닦아놓은 생가터에 갖가지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서동(薯童)은 무왕(武王)의 어릴 적 이름이다.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은 어려서부터 그 재주가 매우 비범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못가에 집을 짓고 과부로 살면서, 그 못의 용(池龍)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서동이었는데, 서동은 어려서부터 마를 캐다가 팔아서 연명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동은 당시,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그 공주를 만나보려고 자신이 캔 마를 가지고 신라의 서울, 경주로 상경했으나 만날 수 없어, 동네 아이들에게 자신의 마를 나누어 주면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선화공주와 서동이 남몰래 정분을 통한다는 내용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향가 ‘서동요’다. 죄 없는 선화공주는 노래 하나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를 가는 길에 서동이 선화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이때, 선화공주가 가지고 온 금덩이를 본 서동은, 뒷산 마를 캐는 곳에 가득한 것이 이 돌들이었다고 하여, 미인과 재물을 한꺼번에 얻은 행운아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1988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가입한 이후, 백제역사유적지구를 포함한 12곳이 등재되어 있다. 보편적이고 뛰어난 가치를 지닌 각국의 문화유산, 자연유산, 그리고 문화와 자연의 가치를 지닌 복합유산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유산을 말한다. 사적 제150호, 미륵사지다. [삼국사기] 무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600~641)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사찰을 건립하여 미륵사(彌勒寺)라 했다고 한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쯤 폐사되었으며, [삼국유사]에 보이는 기록이나 석탑의 특징으로 볼 때 백제 말기인 무왕대에 건립된 것이라 한다.
 미륵사지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일제강점기 때 이미 조사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 결과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한 쌍의 금당과 석탑에는 각기 회랑이 둘러져 있어 탑과 금당을 1개의 절로 생각할 때, 마치 3개의 절이 모여 있는 듯한 삼원병립식 가람배치구성을 보여준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란다. 당간지주 앞에 세워진 동탑은, 역사 고증 없이 건축한 실패작이었다는 설명을 듣고 넓은 가람 터를 처음으로 걸어 돌아보며 서탑인 석탑을 마주하러갔다.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 국보 제11호, 높이 14.2m, 중국에서 전래된 목탑양식을 석재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2001년부터 일제강점기 때에보강되었던 시멘트를 제거하고 석탑을 해체 보수 중, 1층 심주석 상면의 사리공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시대 미륵사 창건사실의 진정성을 한 층 높여주게 되었다.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금제소형판, 청공합 5개 등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금제사리봉영기에는 사리봉안 시기와 누가 언제 석탑을 조성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청동합은 크기가 다른 6개의 청동합 안에 4,800점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구슬 등이 나왔다.
 늘상 사진만으로 보아왔던 석탑, 가림막 속에 감추어진 석탑이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야 마주하게 되었다. 가림 막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위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동탑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많은 고증을 살펴가며 신중하게 복원되고 있었다. 탑신의 1층 네 면에 문을 만들어 사방이 통하게 하였으며, 넓은 옥개석의 네 모서리를 살짝 치켜 올리는 기법 등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되는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백제인의 독창성과 실용성을 증명한다고 한다. 지금도 계속 고증에 따라 복원되고 있다, 현재 7층의 탑신으로 복원되고 있으나,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백제 무왕의 수도로 추정되는 것은 왕궁리유적이다. 일본의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로 천도하고 새로이 제석정사(帝釋精舍)라는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 결과 무왕대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기록된 제석사지는 왕궁리유적 동편 2Km 전방에 있어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면서 지은 왕실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남북 500m, 동서 250m의 벽을 가진 직사각형의 궁성으로, 경사면을 이용하여 4단으로 석축기단을 세워 평탄하게 만든 궁궐터다. 궁궐의 가운데에는 정전건물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궁궐 건물지와 목탑터 그리고 그 뒤에 위치한 대형 정원 등이 확인되었다. 백제의 수도임을 증명하는 ‘수부(首府)’라는 기록이 적힌 기와 등 10,000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 시기의 백제 궁궐은 일종의 생산/상업 기지로서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또 공중화장실 유적도 나왔다.
 
 왕궁리유적 대표 오층석탑,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과, 옛날에 장사 남매가 겨루기로 쌓았다는 설이 있다. 왕궁탑이 기울고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1965년 해체작업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옥개석 이음새로 사용된 꺾쇠에서 '천석(千石)'이라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는데, 아마 왕궁탑을 처음 쌓을 때 참여한 일꾼이 제 이름을 새겨 둔 걸로 추정하였고, 공교롭게도 당시 왕궁탑의 해체 복원을 총감독하는 사람의 이름이 김천석(金千石)이었다고 한다.
 1965년 12월 탑을 해체·수리할 때 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의 심초석 위에 있는 품자형(品字形)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금제 금강경판 19매는,〈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蜜經>이 17행으로 새겨져 있다. 이 금판 19매는 경첩으로 연결되어 전체를 접은 다음 금띠로 묶은 것으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보기 드문 예이다. 청동불입상, 청동요령, 사리장엄구는 사각형 모양으로 내함과 외함의 2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유적은 국보(國寶) 123호가 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귀중한 대접을 받으며 전시되고 있다.
 
 우리의 데이트를 시샘하듯 오후가 되니 비바람이 몰아쳤다. 우리는 굴하지 않고 데이트 코스 순례를 강행했다. 휘몰아치던 비바람이 우리의 열정에 감동하여 잠시 멈춰주었다. 궁궐을 지나 후원터에 올라섰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세상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왕실사찰이었다는 제석사지도 지척에 있었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복을 단아하게 입은 전통음악 연주자들이, 무왕의 초청을 받은 우리를 위해 마련한 가야금, 거문고, 해금, 피리, 장구 등 전통악기들을 연주하는 국악잔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흡사 왕궁연회에 온 것 같았다.
 무왕과 선화공주무덤일 것이라는 쌍릉으로 옮겼다. 먼발치에 옛 모습 그대로 붉은 곤룡포에 익선관을 쓴 왕과 홍원삼에 가체까지 갖춘 왕비가 고운 차림으로 도래솔 길을 정답게 걷고 있었다. 관람객들의 왕복체험이겠거니 무심히 보아 넘겼는데, 대왕릉을 거쳐 소왕릉에 도달하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 어투로 자신을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라 소개하며, 정중하게 우리를 맞아 쌍릉의 유래를 설명해 주었다. 익산지역 연극배우가 우리를 위해 출연한 것이다.
 오늘, ‘서동과 하루 데이트’는 성공적이었고, 무왕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덤이었다.
/정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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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4/04 [09:36]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