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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이 낳은 김덕령 의병장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4/20 [06:26]


빛고을 광주는 무등산이 품은 의향(義鄕)으로 모처럼 무등산 서석대에 올랐다.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호남의 중심지요,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전한 민중혁명의 뿌리인 동학과,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의거와 군부독제에 맞선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무등산(1187m)처럼 높고 크며 변함없는 충절과 큰 인물을 배출한 국난을 극복한 고장이다.   
김덕령(金德齡1567-1596)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장군 곽재우와 권율장군 휘하에서 영남서부와 호남에서 활약을 한 의병장이며 그의 형 덕홍(德弘)은 동래부사를 지낸 광주출신 고경명(高敬命1533-1592)장군 3부자와 함께 금산(고인후), 진주성(고종후) 전투에서 전사 했을 뿐만 아니라, 김덕령 부인 흥양이씨는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 보리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정절을 지킨 보기드믄 충절의 가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며 부친은 김붕섭(金鵬燮), 모친은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여식이다. 김덕령은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한 문무를 갖춘 인물이다. 이들은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로 간다. 그 때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김덕령은 귀향했는데,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등의 권유로 어머니 상중에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감동을 받은 의병들이 큰 세력을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하사 받는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광해군)로부터 나는 호랑이 장군이라는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삼아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다.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전라도 침범에 혈안이 된 왜적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 때 명나라가 왜와의 강화 회담이 진행 중으로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향시킨다.
그 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이순신 장군과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공격하여 격퇴시킨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명군의 강화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분개하였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이 군율을 어겨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진주로 회군하게 된다.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은 이몽학과 은밀한 내통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 죄를 김덕령,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등에게 무고하게 둘러씌워 체포된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억울하게도 29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를 한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이 무등산과 얽힌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과 관작이 회복되어,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된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공훈자 사당에 제사)이 내려졌다. 옥사하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시조 한 수가 전한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김덕령

1678년(숙종 4)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조국강토가 쑥대밭이 된 임진왜란 7년 동안 나주 출신 김천일과 이종인, 고경명 3부자(인후,종후),김덕령,덕홍 형제와 보성의 임계영, 담양의 최경회,  화차를 제작한 장성의 변이중, 순천출신 강희열,해남의 임희진,영광의 심우신, 장흥출신 위대기, 남원의 김익복과 양대박 등 수많은 호남의 의병장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 했는데,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가 없다. 할 정도로 임진왜란 시 호남의 의병이 전국적으로 70%를 차지하여 농민군과 민초들이 군량미 조달은 물론 많은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 나라를 구한 충의(忠義)로운 고장의 역사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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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4/20 [06:26]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