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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왕(王) 장보고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5/11 [00:48]



완도를 세 번째 찾았다. 장보고(張保皐?-846)는 완도 사람으로 통일신라 9세기 초 20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 지역에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낸 기록이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번천문집(樊川文集), 일본후기(日本後紀),속일본기(續日本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와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쓴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장보고(張保皐)는 중국 기록이며, 일본은 장보고(張寶高)라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에는 각각 궁복(弓福)과 궁파(弓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는 8세기경부터 당나라와 빈번하게 교역이 이뤄 졌는데, 장보고도 이때 당나라로 무역상과 함께 건너가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집단 거주지에서 산 것으로 본다. 장보고와 정년(鄭年)은 뜻을 같이한 친구로 무예에 뛰어 났는데, 정년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가면서도 지치지 않았고,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좀 미치지 못했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이라 불렀다한다. 이 두 사람이 모두 당(唐)나라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槍)을 휘두를 때 대적할 자가 없었다.(삼국사기-권 44). 장보고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828년(신라42대 흥덕왕3년)에 귀국해 신라의 무역상들을 괴롭히는 해적들을 소탕하여 당나라 신라 거주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당시 신라인을 노비로 사고파는 816년(헌덕왕 8)에 일명 신라노(新羅奴)라고 불리는 노비에 대한 매매를 금지한 일이 있었다. 장보고가 귀국해 흥덕왕을 만나 "중국 어디를 가나 신라인을 노비로 삼고 있으니 청해(淸海)에 진영을 두어 해적들이 사람을 약취해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청하니 신라 해로(海路)의 요충지인 지금의 완도(莞島)에 설진(設鎭)하니, 그 후로 해상에서 신라인을 파는 자가 없었다.(삼국사기-권 44). 장보고에게 청해진(淸海鎭)대사(大使)직책을 주어 해적들이 사라진 제해권과 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재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지 세력을 결집해 지방 토호 세력으로 크게 성장했다. 신라조정은 36대 혜공왕(惠恭王)이후 왕위 다툼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니 백성들은 나라를 등지고 당으로 떠나갔다. 장보고가 한창 청해진 세력을 키워나갈 무렵 흥덕왕(42대)은 836년에 후사 없이 죽는다. 서열상으로는 흥덕왕의 사촌 상대등 김균정(金均貞)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또 다른 사촌동생인 김헌정(金憲貞)의 아들 김제륭(金悌隆)이 삼촌인 김균정에 맞서니 왕실 종친들은 각각 김균정과 김제륭의 두 편으로 갈라져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과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양(金陽)은 김균정의 편에, 원성왕의 증손인 김명(金明)은 김제륭의 편에 섰다. 이 싸움에서 김제륭이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희강왕(僖康王43대)이 되었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김우징은 겨우 몸을 피해 청해진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는데, 장보고가 흥덕왕(興德王)을 알현할 때 시중이었던 김우징이 청해진 설치에 힘을 실어 준 것으로 본다. 3년 후 또 다시 김명(金明)이 아찬 이홍(利弘) 등과 함께 내란을 일으키자 희강왕(僖康王) 김제륭은 자결을 한다. 김명이 838년 민애왕(閔哀王44대)에 오른다. 김해로 피신해 있던 김양이 와신상담하던 김우징을 찾아와 장보고에게 군사 5천을 내어 민애왕을 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장보고는 군사를 이끌고 갈 책임자로 정년을 지목한다. 김양을 총대장군으로 하는 김우징은 경주도성에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이고 839년 신무왕(神武王45대)에 오른다. 신무왕은 자신을 지원한 장보고에게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을 내리고 식읍(食邑) 2천 호를 주었다. 신무왕은 1년 만에 병으로 죽어 그의 아들 김경응(金慶膺)이 문성왕(46대 文聖王)이 되었다. 문성왕 역시 장보고의 공로를 잊지 않고, 그에게 진해장군(鎭海將軍)의 직위를 주었고, 문성왕은 두 번째 왕비로 장보고의 딸을 취하려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간하기를 지금 궁복은 해도(海島)의 사람이거늘 어찌 그 딸로 왕실의 배우(配偶)를 삼으려고 하십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삼국사기)그러나 문성왕과 조정대신들의 두려운 존재인 장보고가 문제였다. 이때 염장(閻長)이란 장수가 장보고를 죽이겠다고 자청했는데, 문성왕은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거짓으로 조정을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궁복(張保皐)은 힘센 장수를 아껴 의심 없이 그를 잘 대접하였다. 마침내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달래니, 무리들이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八年 春 淸海弓福怨王不納女 據鎭叛 朝廷將討之 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 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 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 投淸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삼국사기) 846년(문성왕 8)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장보고는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 유민들은 벽골군(碧骨郡),지금의 김제에 이주 시켜 농사를 짓게 한다. 장보고는 천한 출신 성분을 뛰어넘어 자기운명을 개척한 거상이자 보기드믄 무장이었다. 보길도와 청산도 등 265개의 아름다운 섬으로 이루어진 국제항구 완도! 장도에는 청해진의 내성과 외성 그리고 목책 등의 유물 흔적이 발굴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 장보고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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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11 [00:48]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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