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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일가의 비화(秘話)(2)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8/10 [08:55]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군산금호학교에 다녔던 백관수와 고하(古下)송진우는 상투를 잘랐다. 그러나 인촌은 상투를 튼 그대로 다녀 ‘애신랑’이란 놀림을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친의 서신을 받았다. 서울에서 배편으로 귀한 손님이 군산항에 오니 줄포 집으로 모시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경술의 국치에 자결을 한 훗날 임꺽정의 저자 벽초(碧初)홍명희(洪命憙)의 부친 진산(珍山)군수를 지낸 홍범식(洪範植)부자를 만나게 된다. 벽초는 동경 다이세이(大成) 중학생으로 까만 교복에 모자가 인상적이었다. 동경유학을 앞둔 인촌은 벽초 로부터 서울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문화도시 동경의 실상을 말로 전해 들었다. 동경유학을 며칠 앞두고 인촌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상투를 제 손으로 잘라 고이 싸서 머슴 손에 들려 줄포 집으로 돌려보냈다.  벽초 홍명희는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함께 식민지 치하 조선의 3대 천재로 꼽고 있다. 벽초의 중조부와 조부는 이조판서 등을 지낸 명문거족으로 해방 후 1948년에 월북한 벽초는 상처를 한 김일성에게 딸 홍영숙을 시집보낸 장인, 사위지간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조선의 부수상직을 맡게 되며 동족상잔의 6.25를 일으킨 김일성과 함께 거물급 인사로 정치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고하와 함께 화륜선(火輪船)시라까와마루(白川丸)에 올라 고향 줄포 변산 앞바다를 지나 목포를 거쳐 대마도의 검푸른 현해탄을 건너갈 때 맑은 가을 밤하늘에는 별빛만 총총히 빛나 홀로가야 할 역경과 긴 꿈같은 인생여정을 가고 있었다. 난생 처음 일본 땅 시모노세끼항에 도착한 인촌과 고하는 눈이 휘둥글 정도로 발전한 일본을 보고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둘이는 세이소꾸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인촌은 영어를, 고하는 수학을 잘했다고 한다. 일본유학 2년째인 1909년10월에는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암살하였다. 긴죠(錦城)중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3년간 학업을 마치고 와세다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10년4월이었다. 친일주구 일진회(一進會)장 이용구와 송병준 등이 조선은 일본에 합병돼야 마땅하다고 조정에 건의하니, 통감부는 임시토지조사국을 만들고 동양척식(東洋拓植)주식회사를 출범하였다. 육군대신 데라우찌가 제2대 조선통감이 되어 융희황제를 협박, 강제조인(1910.8.29)으로 조선왕조,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므로 상당한 인사들이 비분하여 자결을 하고 의병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강직한 송진우는 금방이라도 자결을 할 듯 분노를 뛰어넘어 몇 날을 울분을 참다못해 담양본가로 떠났다. 인촌도 나라를 빼앗긴 것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다가 훗날을 위해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공부에 전념을 하였다. 반년이 지나니 고하는 인촌의 아우 김연수와 같이 나타났다. 영민한 김연수는 아사부 중학을 거쳐 제국대학에 가게 되고, 고하는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학비조달이 어려웠는데 인촌이 매달 20원씩 대주었다. 인촌은 고하뿐만이 아니라 춘원 이광수, 장덕수, 부안출신 김철수 등 수많은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어 훗날 정치와 사업을 하는데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그들로 하여금 되돌려 받는 인촌의 인재양성에 과감한 투자를 한 셈이다. 인촌이 와세대대학 졸업을 앞두고 고향의 두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동경유학을 그렇게 반대했던 두 분은 난생 처음으로 선진화된 동경구경을 하고서 성수,연수 두 형제의 일본유학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게 된다.그러나 일본의 발전상에 압도당한 양부 원파공은 뒤진 조국에 대해 한숨만 내 쉬었는데, 인촌과 고하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그 비밀은 교육에 있다며 유능한 지도자양성만 하면 15년이면 따라 잡을 수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줄포에서 영신학교를 운영하던 원파공은 인촌이 그 학교를 맡아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서울에다가 중학교를 차리겠다는 말에 생부 지산공은 펄쩍 뛰었다.1914년7월 와세다 대학졸업을 한 6년간의 일본유학을 마친 24세의 인촌은 빼앗긴 조국 땅 줄포 집으로 귀향을 한다.

 

인촌은 줄포에서 잠시 머물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강제합방을 당한 조국의 현실은 그야말로 일본인들의 천하가 되어 여러 가지 간섭과 탄압에 시달린 사립학교들이 운영난에 빠진다.

그 중에서도 중앙학교(中央學校)가 파산직전에 놓였는데 인촌에게 인수제의가 들어온다.  

중앙학회 초대회장에 김윤식(金允植),교장에는 윤치호(尹致昊)가 맡은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다. 인촌은 양부 원파공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승낙을 했다. 그러나 생부 지산공은 인촌을 철부지라며 망해가는 학교 인수는 잘못이라며 반대하였다. 인촌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결국에는 생부도 응낙을 하여 3천석의 토지문서를 저당 잡아 중앙학교를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는 허가를 내주지 않아 한동안 애를 먹었는데 와세다대학 은사인 나가이,다나까 교수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허가를 받은 후 유근(柳瑾)을 교장으로 안재홍(安在鴻)을 학감을 맡게 하여, 학교를 인수한 그해 7월에 고하가 메이지 대학을 졸업을 하고 귀국하니 고하에게 교무 일을 맡기고 인촌은 영어와 경제과목 평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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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10 [08:55]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