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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일가의 비화(秘話)(7)
3.1운동과 친일 시비(是非)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11/09 [09:02]



중일전쟁 발발한 직후 전투기 1대를 헌납한 김연수는, 그 비행기 이름이 ‘문명기호’로 김씨일문이 일제에게 헌납한 전쟁비용이 확인 된 것만으로도 문명기의 몇 십 배를 웃도는 거액이었는데도 김연수는 반민재판에서 무죄가 선고 되었다. 그 배후에는 제헌국회를 좌지우지한 한민당 당수 김성수가 버티고 있고 그 본인도 입건조차 안 되었다.

오히려 동아일보에 의해 구속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로 둔갑한 아이러니를 연출한 것이다. 이는 민족정기를 짓밟는 폭거로써 국민을 깔본 정경유착의 실상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1990년 3월 U기자가 만주의 심양(沈陽)지방을 여행길에서 만난 교포 서달근(당시78세)

씨의 말에 의하면 만주 땅에는 남만방적 뿐만 아니라 하르빈의 동양맥주공장, 영구에 있던 대규모 정미소와 단동의 제재소와 만주 각지에 있는 수많은 농장 등을 다 합치면 그 재력은 상상을 초월한 천문학적이라고 말했다. 일제에게 헌납한 전투기 5대쯤은 새발의 피요, 관동군 사령부에 더 많은 군비를 바쳤을 것은 빤한 노릇으로 그러니 관동군사령부가 뒷배를 봐줬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서 노인은 심양시 소가툰구 대숙수 왕수촌에서 60년을 살았는데 일제 때 남만방적에서 3년 간 일한 교포로써 본향은 경북 칠곡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서 노인은 1939년경 김연수는 17만평에 달하는 남만방적 공장에 수 백 대의 방직기계와 재봉틀을 새로 들여와 군복제조를 하여 목단강에 있는 관동군 보급창으로 밤마다 기차에 실려 운송되었고, 그 공장에는 일본군 병졸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섰다고 한다.

8.15 해방을 맞아 소련군이 들어와 남만방적 공장 방직기계를 모두 떼어가 버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중국정부가 자동차공장을 세웠다. 김연수는 민족지라는 동아일보에 의거 일제에 협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그 당시 상황이었다고 김씨일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짓밟히고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불사조 동아일보의 모습에 실의의 민중은 암흑에서 영광을 보았고, 절망에서 희생을 찾았고 민족의 영원한 생명에 믿음을 가졌다. 그리하여 억울한 자는 여기 호소하였고 지사들은 여기서 그 뜻을 폈고, 국내의 투사들은 이를 통하여 광복의 계획을 다졌다. 그것은 완연히 정부 없는 백성의 무형의 정부였다.(동아일보사 권1,김상만(金相万) 사장의 간행사 P.6)]

1920년 초반부터 1930년 후반까지 10여 년 동안 한반도를 통치한 조선총독은 사이또오 마꼬도(齋藤實),우까이 잇세이(宇桓一成),미나미 지로오(南次郞) 등으로 이들 세 총독이 김씨일문의 번영을 가져다 준 인물들이다. 그 중에 3대 5대 총독을 거쳐 일본 내각총리기가 된 사이또오 마꼬도(齋藤實)는 사실상 동아일보 설립과 김씨일문을 직,간접적으로 도운 은인이었다. 사이또오와 김성수 간에 오고 간 편지내용을 볼 것 같으면 경성방직을 특별히 배려해 준 것에 감사의 뜻을 표 했는가 하면, 그 표시로 국보급의 명품 기국일기(器局一器)를 선물하였다. 사이또오 총독은 3.1운동 그 해 8월에 제3대 조선총독이 되어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편 해군대장 출신의 음흉한 자였다. 그가 창안해낸 문화정치는 친일세력을 육성발전 시켜 민족적 반항의식을 약화, 수많은 민족인사들을 변절시켜 일본 자국에 공헌한 자였다.

김성수 등이 총독관저를 빈번히 드나들던 인물들을 열거해 보면(1919-1926사이)*박영효-동아일보 초대사장48회,*장덕수-동아일보 주간12회,*송진우-동아일보사장15회,*김성수-경성방직사장13회,*진학문-동아일보창간주간29회,*이상협-동아일보편집장 7회로 알려졌다.(자료발췌: 강동진 著 ‘일제하의 한국침략 정책사 p.169-170) 3.1운동은 세계적인 전 민족이 참가한 민족해방투쟁이었다. 이 운동은 국내방방곡곡은 물론 미국,일본,만주,노령 등 해외 거주 동포들까지 참가한 대한독립을 부르짖은 민족운동이었다. 그런데 인촌 김성수 일가는 한 사람도 만세운동에 참여한 일도, 일경에게 잡혀간 일도 없다. 이것은 바로 친일 기득권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며 자기 재산보호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몸을 사리는 수법일 뿐이다.

 

3.1 만세운동 때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축에도 끼지도 않고 2월23일에 줄포 집으로 낙향, 3월10일경에 나타났다. 인촌 김성수전에는 그 당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립운동은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제2,제3의 운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인지라 제1선에서 희생되는 이들의 뒷바라지를 할 사람도 있어야 했다.(중략) 이 때 인촌이 노출되지 않음으로써 중앙학교는 살았고 ,얼마 안가 민족 언론, 민족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민족교육도 전문교육까지 확대 할 수 있었다.(인촌김성수전 P.135)] 중앙학교와 나란히 명문사학의 하나로 손꼽히는 보성학교(普成學校)의 경우를 보면 민족대표33인 중의 하나인 손병희와 교장 윤익선(尹益善)은 만세 시위에 직접 나섰다가 체포 투옥된바 있었으나 보성학교가 이문제로 폐쇄 되지는 안했다. 중앙학교장 송진우가 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6개월간 징역형을 받은 사실을 상기할 때 [인촌 김성수 전]은 설득력이 없다. 만세운동은 4월 초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졌으나  가담자 2백 만 명 중 사망자7,500명,부상자16,000명, 체포 연행자 4만8천명으로 780여회의 무력시위를 통해 일 군,경 피해자160여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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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09 [09:02]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