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그는 과연 누구인가(2)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11/23 [09:28]

김정은 그는 과연 누구인가(2)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11/23 [09:28]



김정은은 김정일의 세 번 째 아들로 1984년 1월 출생했다. 어머니는 재일 교포 출신으로 북한에 건너간 고용희다. 북한에서 재일교포는 "째포"라고 불리며 우대받지 못하는 계층에 속한다. 그래서 김정은이 후계자가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백두혈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고용희를 만나기 전에 이미 첫 번째 여인인 성혜림과의 사이에 서 1971년 태어난 김정남이 있었다. 두 번 째 여인인 김영숙과의 사이에는 1974년에 태어난 김설송도 있었다. 성혜림은 김정일을 만났을 당시 이미 딸이 하나 있는 유부녀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고용희에 앞서 성혜림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김정남은 김일성의 첫 번 째 친손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정남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김정은은 2017년에 접어들면서 집권 6년째를 맞았다. 그러나 조부 김일성이나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자신의 생일인 1월 8일 공개적인 축하 행사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 고용희가 재일교포 출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일 행사를 하면 당연히 어머니 고용희도 거론되어야 한다.

재일교포 출신이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북한에서 은밀히 나도는 "김정은은 백두혈통이 아니라 후지산 줄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확인될 수 있다. 김정은의 백두혈통 주장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김정은은 자신의 친조모이자 김일성의 첫 번 째 부인인 김정숙 우상화 작업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어머니인 고용희를 우상화하지 못한다. 고용희는 재일교포라는 불리한 출신 성분에 더해 무용수 출신이기도 하다. 북한 사회에서 무용수 출신은 평판이 좋지 않다.

고용희는 1971년에 만수대 예술단에 들어가 무용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5년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파트너로 참석하고 1976년부터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했다. 고용희와 김정일 사이에서 1981년 김정철, 1984년 김정은, 1989년 김여정이 태어났다.

고용희는 195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1962년 가족과 함께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갔다. 북한은 재일교포 출신들에 대해 일본 식민지 시절 항일운동을 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협력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재일교포는 믿을 수가 없다며 공직 선출이나 대학 진학 등에서 여러 사회적 불이익을 주고 있다. 고용희도 상당히 심리적 부담감을 가졌을 것이다. 비록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 해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다. 김정일이 고용희를 만났을 당시 이미 김정은에게는 성혜림과 김영숙 등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고용희는 김정일의 세 번 째 여인인 셈이다. 특히 성혜림과의 사이에서는 이미 아들 김정남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희는 편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출산을 한 뒤에도 상당 기간 동안 김일성에게는 비밀에 부쳐졌다. 떳떳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오랜 기간 고용희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김정은이 태어나고 몇 년이 지나서야 그 존재를 알았다.

처음에는 첩의 자식이라며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상태에서 임신을 하게 되면 임산부의 불안정한 정서 상태가 태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아이가 자라면서 편집증, 과시주의. 과대망상, 구원환상, 예측하기 어려운 충동성, 낮은 수준의 도덕발달 등 여러 가지 정신 병리적인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편집증을 가진 사람은 일단 의심이 많다. 선한 동기를 가지고 도움을 줄 때도 조심해야 한다. 도움을 주는 이유에는 어떤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가지고 도움을 거절하는 경우가 있다.

김정은은 노동당 부부장급 이상과 인민군 소장급 이상에 대해 2012년에 3명 정도 숙청했다. 그 뒤 2013년에는 30명, 2014년에는 40명, 2015년에는 60명 정도를 숙청해 제거했다. 고모부 장성택이 자신의 권력을 찬탈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2013년 고사총으로 100여발 이상을 난사해 처형했다.

시신을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없애는 잔혹한 면을 보였다. 인민군 서열 2위인 무력부장 현형철이 자신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꾸벅 졸았다는 이유로 재판 절차도 없이 2015년 말 경에 공개 처형했다. 북한에서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감시망이 더 촘촘해진다.

자택 내 도청이 일상화된 것은 물론이다. 해외공관의 경우 직원들 간에 상호 감시하기 위해 같은 아파트에 모여 살게 한다. 2012년 군부 실세로 알려진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이 숙청된 것도 김정은에 대한 불만이 도청되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2015년 5월 9일 러시아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번복하고 2015년 5월21일 개성공단을 방문키로 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방문 허가를 급작스럽게 취소했다.

2015년 12월 12일에는 오후 7시 30분으로 예정된 북한 모란봉악단의 중국 베이징 공연을 3시간 앞두고 공연 취소의 이유도 밝히지 않고 모란봉악단 단원들을 평양으로 귀국시켰다. 이 세 가지 사건은 2015년 1년 동안 발생한 일이다.

북한의 최대 우방국인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국제연합의 사무총장에 대해 손바닥 뒤집기 하듯 즉흥적으로 취소해 버렸다. 예측 불가한 충동적 행동과 분노 조절의 어려움을 나타낸 셈이다. 김정은은 무모하고 과시적인 성격도 있다.

2006년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은 미군에 체포되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전범으로 사형당했다. 김정은은 이 같은 상황에 처해지면 회복할 수 없는 자존감 손상으로 화를 참지 못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패전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처럼 자살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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