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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은 누구인가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12/02 [16:22]



덩샤오핑의 이름은 중국어 간체자로는 邓小平, 정체자로는 鄧小平이다. 병음은 덩샤오핑(Dèng Xiǎopíng) 이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중국 공산당의 소위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다. 체구가 극히 작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거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 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둥과 한나라의 고조와 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점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그는 1904년 청나라 쓰촨 성 광안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는 뜻의 선성(先聖)으로 지어주었고, 다섯 살 때에 서당 훈장이 희현으로 고쳐주었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된 후에 만들어낸 별명이다.

그는 아버지가 지주였기 때문에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낙관주의 곧 모든 일을 좋게 생각하기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낙관주의는 정치가로서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주었고, 원만한 성격 덕분에 공산당에서 적이 없었다. 덩샤오핑은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충칭에서 공부했다.

그 뒤 근공검학 즉 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는 정신으로 해외 유학을 떠난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와 서구 문물을 배우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1,500명의 중국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훗날 중국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도 1920년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에 갔다. 유학생일 때에 덩샤오핑은 파리의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들어갔으며, 기관지인 적광(赤光,붉은 태양)을 만들었다. 저우언라이를 만난 때이기도 하다. 저우언라이는 자신보다 여섯 살 어린 덩샤오핑을 아꼈으며, 덩샤오핑도 그를 큰 형님으로 따랐다.

덩은 또 1926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동맹 탄압 때문이었다. 소련 유학시절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에 돌아왔다. 유학을 마친 덩은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혁명에 참여했다.

1933년 중국 공산당에서는 소련파와 마오파의 당권 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쩌둥이 지면서 덩샤오핑도 실각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은 중국에 맞지 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다. 그러나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1935년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마오이즘)이 인정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덩샤오핑은 류보청이 사단장인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일했다.

화이하이 대전에서 덩샤오핑이 이끈 60만명의 군대는 100만명의 국민당 군대를 크게 이겼다. 1946년부터 1949년 국공 내전 시기에 화중, 화남, 서남지방이 해방되었다. 덩은 쓰촨, 꾸이저우, 윈난, 티베트 등 서남지방 4개성을 다스리는 제1서기가 되었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아내는 장시유안으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의 첫 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죽었다. 그 아이 또한 아기 때에 죽었다.

두 번째 아내인 진웨이잉은 그가 1933년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된 직후 그를 떠났다. 세 번째 아내인 줘린은 윈난 성의 한 실업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38년에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야난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굴 앞에서 덩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2남 3녀 5명의 자식을 두었다.

당시 홍위병에 쫓겨 다니던 큰아들 덩푸팡(1944년-)이 베이징대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 되는 슬픔을 겪었다. 덩푸팡은 1984년 장애인복지기금, 1988년 장애인연합회, 1999년엔 지적장애인의 자활을 돕는 단체 등의 장애인 인권단체들을 만드는 등 장애인 인권 운동을 했다.

덩은 여러 번 숙청당했다가 기적적으로 복귀를 반복하여 그에게는 오뚜기 또는 부도옹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이후 마오쩌둥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지 않고 그에게는 '공이 7이요 과는 3이다'라고 냉정한 평가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덩샤오핑 서기장은 젊은 시절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으며, 르노에서 트랙터를 만드는 금속 노동자로 살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금속 노동 경험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학생시절 중국 공산당(CCP)에 가입하기도 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등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는 국가 원수직에 있었다. 1983년 이후 국가 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 주석직의 교체에 관여했다.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 막후 실력을 행사했다.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했다.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중국식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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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02 [16:22]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