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와 국토 불균형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12/05 [17:22]

경부고속도로와 국토 불균형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12/05 [17:22]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민족 번영 간선 대동맥으로 평가 받는다.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국토개발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도로는 국토의 불균형개발을 가져왔다.

실제로 강원과 호남을 잇는 강호축 개발은 상대적으로 경부축에 밀리면서 불균형 개발을 가져왔다. 최근 강호축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국토 불균형 발전은 결국 경부축에도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다.

경부고속도로가 놓이기 시작한 1968년 서울-부산 구간은 복선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대전-목포 구간은 단선 철도로만 연결되어 있었다. 경부선은 1945년에 이미 복선화가 되어 있었고 1971년부터는 전철화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호남선은 1968년에 비로소 복선화가 시작되고 2004년에 겨우 끝났다. 전철화가 시작된 것도 2001년부터였다. 이와 관련하여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되기 전 1967년과 1968년 국회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는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반대가 전혀 아니었다. 고속도로 자체는 사회간접자본 확충이라며 찬성했다. 반대한 것은 건설의 순서였다. 영남으로의 교통망 편중으로 불균형이 심화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국민적 반대도 물론 없었다.

국민 여론조사 자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관을 줄 세계은행인 IBRD는 경부고속도로의 우선적 건설을 반대했다. 서울과 부산 간에는 복선 철도가 놓여 있고 국도와 지방도도 잘 갖추어져 있으니 서울과 강릉 간 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IBRD는 자원이 많은 영동지방과 수도권을 동서로 연결하는 것이 한국의 발전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된 것은 1945년부터 복선이었던 경부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호남을 연결하는 철도는 그때까지도 단선인 데다 낡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이러한 반대에 대해 경부고속도로를 빨리 건설할 것이며 그 후에는 강원과 호남에도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 맞춰 완공 일정을 무리하게 잡게 된다. 그 결과 건설 과정에서 77명이 사망하고 건설 후에는 단기간에 건설비용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리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부실로 인한 엄청난 수리비용으로 인해 강원과 호남에도 곧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약속은 지켜지기 어려웠다. 고속도로 건설을 국민이 반대했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야당이 반대했다는 주장도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세계은행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협정에서 얻은 차관 등으로 경부고속도로부터 무리하게 완공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10년 동안은 교통량이 많지 않았다. 세계은행의 권고대로 먼저 서울과 영동을 연결하고, 그 다음 서울과 호남 사이에 복선 철도나 고속도로를 건설했어야 맞는 일이다.

그 다음 경부고속도로를 시간을 두고 완벽하게 건설하는 것이 바른 순서였다. 비용 면에서도 오히려 절감되었을 것이고, 국토균형 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국토불균형개발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현상은 심각했다.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던 영동지방이 국내 산업에 효과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다. 세계은행의 요구대로 서울과 영동부터 고속도로로 연결했다면 지금 동해안 도시들은 훨씬 발전해 있을 것이다. 또한 호남이 철저히 소외되게 되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교통에 관한 한 영남에 비해 20년 이상 뒤쳐지고 말았다. 그 결과 호남 지역의 경제가 크게 낙후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서울에는 빈민가가 늘어나게 된다. 영남의 경우는 다르다.

서울과 부산 간에 편중된 철도와 고속도로는 국토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물자와 자본이 서울에 집중되면서 부작용을 가져오게 되었다. 모든 것이 서울과 수도권에 편중된 지금과 같은 경제, 사회 구조는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그 출발은 국토의 불균형 개발이다.

국토균형 발전이라는 큰 원칙을 지켰더라면 영동과 영남과 호남이 중심도시를 근거로 하여 전체적으로 발전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서울의 경우 지금처럼 비대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과정은 국토 불균형 개발의 가장 중요한 사례가 된다.

한편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 총공사비 42,973백만 원을 투입하여 만 2년 5개월만인 1970년 6월 30일에 완공하여 7월 7일에 개통하였다. 우리의 기술과 재력으로 건설한 건설 사업 가운데 최대 규모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싸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건설되었다. 429km를 건설하는데 429억 원이 들어갔다. 당시 일본 동명고속도로의 8분의 1수준이었다. 특히 1년 7개월 만에 완공했다. 물론 부실공사로 인해 1990년 말까지 보수비만 1,527억 원으로 건설비의 4배가 들어갔다.

개통 후 몇 개월 이내에 전 구간이 파손되는 현상을 보였다. 이어지는 호남고속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암반 구간, 교량 구간에 구분 없이 동일한 현상이었다. 미리 정해진 일정을 맞추기 위하여 군대가 적을 향해 돌격하는 방식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돌관공사(突貫工事)는 숱한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군에서 차출된 공사 현장 감독들은 잦은 초과 작업과 철야 근무로 인부들을 압박했다. 무리한 공사 진행은 잇단 사고를 불렀다. 또한 예산 제약으로 인해 도로의 너비, 포장 두께가 불충분하게 설계되았다.

개통 직후부터 노면 파손은 물론 노반이나 축대 붕괴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보수 공사가 쉴 사이 없이 계속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1980년대가 되면서 경부 고속도로는 불과 1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설계·건설된 누더기 고속도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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