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장마당 세대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12/20 [16:11]

북한의 장마당 세대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12/20 [16:11]

 북한의 장마당 세대는 1980~1990년대 태어난 북한의 20·30대 청년들이다.  이들은 시장원리에 익숙하며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장마당 세대라는 이름은 북한의 종합시장을 의미하는 장마당에서 따 왔다. 북한의 장마당은 1990년대 경제난과 더불어 시작됐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인 북한에서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진 상징으로 여겨진다. 장마당 세대는 북한의 배급망이 붕괴하면서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세대다. 이들은 어린 시절인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을 겪었다.
 추위와 가뭄,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자랐다. 고난의 행군은 본래 1938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빨치산이 했던 일이다. 중국 지린성에서 압록강 연안 국경지대까지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영하 40도의 추위와 식량난 속에서 감행한 행군이다.
 1990년대 중반 경제난과 수해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자 북한 정부는 고난의 행군을 언급했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자고 호소했다. 장마당 세대는 최악의 경제난과 식량난이라는 상황을 겪으며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지 않은 채 성장했다.
 가장 큰 특징은 장마당을 통해 시장경제를 경험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 암시장이었던 장마당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차츰 시장원리에 익숙하며 외부세계의 문화와 정보를 받아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념보다는 경제활동에 관심이 많아졌다.
 개인주의적이며 개방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외국과 한국 문화를 접하고 동경한다. 컴퓨터나 휴대폰 등 디지털 기기에도 익숙하다. 장마당 세대가 북한 체제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장마당은 경제난이 심해지던 1990년대 불법으로 처음 등장했다. 당시 국가의 배급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결국 주민들 스스로 생계를 위해 농민시장을 활성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시장은 사회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수요를 맞추기 위해 1958년부터 운영된 농축산물 거래 시장이다.
 1990년대 농민시장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다. 농민에서 공업 종사자와 사무직 종사자로 확대되었다. 보다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를 장마당이라고 말한다. 장마당의 통제가 어려워지자 북한 당국은 2003년 장마당을 합법화했다. 종합시장과 사회주의 물자교류시장, 수입물자 교류시장 등으로 구분해 유통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장마당 세대’라고 불리는 북한 20?30대 청년층에서 민심 이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도 수령의 교시나 방침 등을 관철하는 데 선봉에 서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받아왔다. 그러나 오히려 수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김정은에 대해‘걔’라고 표현하는 게 일상화됐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경우 주민들은 일상 대화에서도‘수령님’‘장군님’호칭을 습관적으로 붙였다. 물론 지금도 김정은에 대해서‘원수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공개된 자리에서 처벌을 피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일 뿐이다. 습관화 되지는 않고 있다. 겉으로는 세뇌 당한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격화가 내밀하게 되어 있지 않다.
 아무리 우상화 교육을 진행해도 시장을 통해 확산되는 외부의 정보와 비교대조해 볼 수 있다. 장마당 세대들은 최고 지도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호칭 문제에서도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정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도 없다. 노동신문 등 매체에서 상황에 따라‘최고 존엄’‘원수님’‘동지’‘각하’등을 사용하면서 혼란을 주었다. 그러나 젊은 층에서는‘그’혹은‘걔’라는 표현이 먼저 입 밖으로 나온다.
 청년들은“‘걔(김정은)’가 우리를 먹여 살려줄 것 아니니, 그냥 우리끼리 잘 살자”고 말한다. 그런 분위기는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다. 김정은에 대한 우상화 선전이 강화되고 있지만 선대 수령과는 달리 권위가 높아지지 않는다.
 장마당 세대는 당국의 선전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이들은 누구보다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전의 북한 주민들과 의식체계와 가치관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조선노동당의 조직적인 통제가 과거에 비해 약해진 것과 무관치 않다.
 북한은 노동당원 외에도 전체 주민을 각 부문별 조직에 묶어 개개인의 생활과 사고까지 철저히 관리해왔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전면에 등장했던 1974년‘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한 이후 전 주민에 대한 조직생활은 매우 강해졌다.
 당원들은 당 생활총화에, 비당원들은 자기가 속한 근로단체조직의 생활총화에 무조건, 성실히 참가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조직생활은 이젠 형식적인 통제에 그치고 있다.
 2003년 종합시장이 합법화되면서 공장기업소와 개인의 독자적인 경제활동이 장려됐다. 근로단체조직의 조직 생활은 점차 이완돼 왔다. 독립채산제가 강화되면서 각 공장기업소에서는 돈을 벌어서 일정액을 해당 직장에 바치고 나머지 이윤은 개인이 가지도록 하는‘8?3'을 장려했다.
 직장에 적(籍)만 걸어두고 사적(私的)인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됐다. 직장에서는 이들로부터 돈을 받는 대신 생활총화를 주(週) 단위에서 월(月) 단위로 조정해준다. 각종 조직 활동에서 빼주는 등 편의를 봐준다.
 벌이가 괜찮은 편인 무역기관 등을 제외하곤 일반 공장기업소는 생산 활동이 거의 마비됐다. 젊은 사람들은 아예 공장에 출근 자체를 안 하고 있다. 공장의 당 조직에서도 출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동선만 보고하라”고 당부할 뿐, 돈벌이를 장려한다.
 그루빠(단속원)들이 직장에 나가지 않은 청년들을 단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처럼 강력한 통제를 가하긴 쉽지 않은 분위기다. 직장에 나간다고 해도 일감이 없고, 일을 해도 봉급을 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청년들 사이에서 북한 특유의‘집체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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