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박영효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1/10 [17:17]

풍운아 박영효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1/10 [17:17]


 박영효(朴泳孝1861-1939.9.21陽)는 철종 12년 진사 박원양의 아들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무량(無量), 자(字)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본관은 반남이며, 일본식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1884년 갑신정변 3일천하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할 때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고 한다.

1872년(고종 9년) 13세에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여 금릉위 정일품 상보국승록 대부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3개월 만에 영혜옹주와 사별하였다. 1870년 중반 박영효는 큰형을 따라 부안현감과 평양감사를 지낸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1807-1876)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역관 오경석, 승려 이동인, 의관 유대치 등 북학파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결과 1879년경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과 19세의 약관에 개화당을 만들었다. 1882년에 군인들의 급료에 모래가 섞인 쌀을 배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는데 그 수습책으로 박영효는 제3차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간다. 3개월간 머물며 일본 정가와 세계 각국의 외교관을 만나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본 선각자인 셈이다.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박영효는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발탁되었다. 임오군란 때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사과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교환을 무난히 수행하며 손해배상금 50만원의 지불방법을 완화, 교섭하는 상당한 외교술도 발휘하였다. 이듬해 일본에서 귀국한 박영효는 대신 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으로 있으면서 박문국, 순경부 치도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고 도로를 정비하였으며 신식 경찰 제도를 도입하려는 등 개화정책을 펼치려 했으나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박영효는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민태호 등의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배신과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실패한 박영효(朴泳孝)는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다. 1882년 도일(渡日)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의 태극기 4괘(卦)의 좌·우를 바꿔 재 도안 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 등살에 귀국하여 다시 갑오개혁을 주도했는데, 장장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와 수구파에 몰려 개화파들과 함께 일본으로 또다시 쫓겨 갔다. 일본 망명 기간 고종의 폐위를 기도한 모함을 받았지만 되려 1907년 고종 황제 양위를 막으려다 친일파들에게 투옥, 유배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초반에는 기업과 은행 활동에 전념했으며, 이후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 고문도 지냈다. 19세기 말 미개한 조선의 개화를 위해 목숨을 건 애국충정을 실천한 개화사상가(開化思想家)이며, 정치가였던 그는 부마라는 신분으로 고위 관직인 한성부판윤을 지냈는데 민씨 척족들의 견제를 받아 3개월 만에 경질되기도 했다. 일본 망명 중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자기살가죽을 벗기는 심정으로 각고(刻苦)했는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일본이 개입하자 일본에서 귀국, 내무대신의 관직을 받고 여러 가지 개혁에 착수하면서 독자노선을 고집한다. 1년 후인 1895년 을미사변의 민비시해, 반역음모사건에 휘말려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다. 구태를 벗지 못한 조선을 개혁하여 외세와 맞서려던 풍운아(風雲兒) 박영효는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보고 통곡을 하였다. 나라는 이미 기울어 을사늑약과 1907년 이등박문이 초대총독으로 부임하여 조선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는데, 다시 귀국 한 박영효는 궁내부대신이 되었으나 수구매판세력과 등져 7일 만에 물러난다. 조선을 삼킨 원흉 이등박문은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저격당한다.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문화정치를 펴며 박영효에게 일제가 주는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아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박영효는 조국근대화와 개방개혁으로 외세와 맞서려 했으나 조선조 500년은 이미 썩고 낡은 수구매판세력에 의해 애석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촌보다 30세나 위인 원로급 유명인사 박영효는 1920년 김성수가 주도한 동아일보 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79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는데,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어느 특정 시기만을 대상으로 할 수 없으며 공과(功過)의 친일 시비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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